비우는 것은 채우기 위한 행위다. ‘동판의 연금술사’인 판화가 강승희(54·추계예대 미술대학장) 작가의 작업이 그렇다. 30년 가까이 새벽 풍경을 그렸다. 한강 하류 김포평야부터 전국 산하를 돌아다니며 새벽 풍경을 동판에 새기는 작업이다.
제주에서 태어난 그는 오현고를 졸업하고 홍익대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그에게 서울은 고층 빌딩과 소음의 도시로 낯설었다. 새벽 도시 풍경의 삭막함과 서정성에 점차 익숙하게 되고 정을 붙이게 됐다. 그런 감성을 한 편의 수묵화처럼 펼쳐보였다.
그의 개인전이 서울 종로구 관훈동 노화랑에서 열린다. 비움과 간결함이 돋보이는 흑백 판화 100여 점을 선보인다. 흑백 동판화로 작업한 작품들이 고독과 명상의 세계로 안내한다. 작가의 그림에는 빈 배와 빈 산, 빈 들녘 나무가 많다. 군더더기 없는 표현을 통해 독특한 서정을 선사한다.
작가는 대학에서 판화 부전공으로 동판화를 시작했다. 졸업 후에는 본격적으로 판화로 작품 제작에 몰두했다. 풍광 좋은 제주도가 고향인 그는 삭막한 서울의 새벽 풍경에서 자연을 발견하고 고독함을 치유하는 새벽을 소재로 줄곧 작업했다.
그의 초기작들은 도시의 새벽 풍경들을 자신의 심상 풍경으로 구현한 동판화 작품이었다. 오랫동안 살았던 번잡한 도시, 서울을 떠나 김포로 내려가면서 그의 작품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최근작들은 강과 산 그리고 들판이 넓게 펼쳐진 풍경들이다.
투박한 시골길을 거닐며 경험한 여유로운 풍경으로부터 얻은 시정을 고스란히 작품에 담아내는 것이다. 순수한 새벽의 서정을 표현하기 위해 불필요한 요소들을 화면에서 걷어버리고, 비어있으나 상념과 아련한 기억만 남아있는 공간으로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그의 판화는 노출부식이라는 기법과 자신이 직접 제작한 강철 니들을 사용함으로써 기존의 판화보다 훨씬 깊고 다양한 표현이 가능하다. 노출부식은 판 위에 직접 붓으로 흘리는 방법으로 판을 부식하는 것이다. 마치 수묵화를 보듯이 부드러운 농담을 엿볼 수 있다.
국내 판화 산업은 고사 위기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다. 작가는 말한다. “대학원 때 유럽을 여행하면서 서양화로는 더 이상 새로울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나라는 중국과 일본에 비해 판화에 대한 위상이 형편없어요. 그런 인식을 바로잡고 싶었습니다.”
김영호 미술평론가는 “그의 작품은 동양의 자연관에 기반을 둔 명상적인 세계와 더불어, 간결한 볼륨과 형태로 구성된 순수조형의 세계를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그의 조형적인 독자성은 풍경의 너머에 자리한 이상 세계를 표상하려는 것”이라고 평했다.
지난 시절의 쓸쓸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고 고독감이 물씬 묻어나는 이번 작품은 모두 점당 100만원에 판매한다. 각 그림은 한정판 20점이다. 작품을 구입하면 화랑에서 액자도 해준다. 모처럼 판화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기회다. 전시는 27일까지 계속된다(02-732-3558).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
'동판의 연금술사' 판화가 강승희 작가 노화랑서 27일까지 개인전 '새벽 풍경' 30여점 전시
입력 2014-11-12 2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