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만 관객을 넘어섰다는 영화 ‘명량’을 봤다. 솔직히 약간 실망스러웠다. 컴퓨터 그래픽이 뛰어나고 실제 연예인들이 연기를 한다 뿐이지, 삼류 만화영화를 본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나 할까? 명량에 대한 언론의 대대적인 찬사는 대부분 이 영화가 그동안의 관객 동원숫자의 기록을 어떻게 갈아 치웠는가에만 집중됐을 뿐이다. 정작 이 영화에 대한 작품성이나 제대로 된 평론은 없었던 것 같다.
하긴 영화를 볼 때마다 늘 실망스러운 것은 영화 탓이 아니라 내 탓일 것이다. 영화를 즐기려는 자세보다는 영화에서 메시지를 찾으려 하고 논리적인 전개를 찾으려 하는 나의 잘못된 영화 접근법이 문제임에 틀림없다. 영화는 비판적 시각으로 볼 필요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그 영화에 몰입돼 그 영화가 관객들에게 주는 재미에 푹 빠져드는 것이 본전을 뽑는 일일 것이다. 설교를 듣거나 성경을 읽을 때에도, 우리에게 전하려는 메시지에 푹 빠져드는 것이 설교를 듣고 성경을 읽는 데 정말 필요한 자세이듯이 말이다. 같은 예수님의 메시지를 듣고도 바리새인처럼 분노하고 있다면, 그건 예수님의 문제가 아니라 바리새인들의 문제임에 틀림없다.
영화를 본 후에 이제는 바다를 포기하고 육군에 합류해야 한다는 부하들과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는 이순신의 모습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군사들 가운데는 지는 것이 뻔한 싸움을 앞두고 탈영하는 자들이 생겨나고, 이순신의 참모들은 이런 저런 방법으로 바다를 포기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이순신은 12척의 배를 가지고 어떻게 일본군 330척의 배를 물리칠 수 있는지 부하들을 설득할 수 없다. 아무리 설명한다 해도 부하들이 이순신의 계획을 이해할 리 없다. 이순신의 작전은 자살행위처럼만 느껴질 뿐이었다.
이순신은 내부의 반대자에도 불구하고 바다를 포기하지 않았다.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더라도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그의 길을 막는 자는 칼로 목을 베어버리고, 끝까지 자신의 고집을 지켜 나갔다. 그리하여 결국 명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어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이게 거의 불가능하다. 그것은 독재와 가깝고 불통(不通)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쓸게 뻔한 것이다.
오늘날을 사는 현대판 이순신의 고민은 이것이다. 바다를 포기하고 육군에 합류하는 것은 나라가 망하는 길인데, 그렇다고 12척의 배로 330척을 이길 수 있다는 전혀 불가능한 이야기를 설득시킬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순신은 자신에게 주어진 권위로 부하의 목을 따면서 따라오게 했지만, 오늘날의 리더는 그럴 수 없다. 오직 리더를 자발적으로 신뢰하고 따라줄 수 있을 때 리더의 계획은 시행될 수 있다. 이순신의 리더십이 통하지 않는 시대라면, 이젠 리더를 믿고 따르는 팔로워십이 필요한 시대이다.
성도는 예수님의 리더십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다. 오른 편 뺨을 맞으면 왼편 뺨도 돌려대라는 말도 안 되는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고,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죽음의 길을 가라는 권고를 믿고 따르는 자들이다. 그 길은 꼭 죽을 것 같은 길이지만, 그 길이 살 길임을 믿으면서 말이다.
이국진(사진) 목사
대구=최일영 기자 mc102@kmib.co.kr
[목회자칼럼]대구남부교회 이국진 목사 "명량과 이순신 리더십"
입력 2014-09-04 1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