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대 라틴역사가들에 의해 비잔틴제국이라고 명명된 이 나라를 비잔틴인들 자신은 ‘로마제국’(Imperium Romanum)이라고 불렀다. 로마제국의 역사는 계승되었으며 동·서 로마제국의 분리(397), 서로마제국의 멸망(476) 후에도 비잔틴황제들은 하나의 로마제국을 회복하고자 노력하였다. 제국의 공용어가 라틴어에서 그리스어로 통용된 것도 610년에 이르러서이다. 이 때 부터 비로소 동방정책의 실시와 함께 동로마제국 고유의 특징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콘스탄티누스대제가 수도를 유럽과 소아시아가 맞닿은 보스포로스 해협의 그리스 식민도시 비잔티움(후에 콘스탄티노플로 개명)으로 옮긴 이유는 광활한 영토의 통치와 이민족 침입의 방어라는 행정적, 군사적 이유 외에 구로마의 권력구조와 전통을 쇄신함으로 황제 중심의 강력한 전제정치를 구현하기 위해서였다.
2. 옛 서로마제국의 수도 라벤나(Ravenna)에 세워진 산비탈레성당(San Vitale)의 모자이크벽화는 기독교를 통해 새로운 로마를 이루려한 콘스탄티누스대제의 이상이 비잔틴제국의 정교합일 황제교황정치(Caesaropapismus)의 모습으로 구현된 것을 나타낸다.
동고트족에 점령당했던 라벤나를 재탈환한 유스티니아누스황제의 업적(539년)을 기리며 황실의 권위와 궁정 생활의 일단을 품위 있게 재현한 이 작품은 비잔틴미술의 정수이다.
유스티니아누스황제와 테오도라황후 그리고 수행원들을 묘사한 모자이크화의 인물상들은 황금빛 배경에 둘러싸여 운동감이나 표정이 없이 엄숙하게 정면을 보도록 배치됨으로 정형화된 모습을 지닌다.
표현대상의 절대적 권위, 초인간적인 위대함, 신비적 위엄을 나타내기 위한 고대 오리엔트미술의 정면성(正面性, Frontalitaet)의 법칙이 적용되었는데 양식의 일관성을 갖추기 시작한 이 시기를 비잔틴 미술의 제 1 황금기(526-726년)라고 한다.
(사진 1) 유스티니아누스황제와 수행원들, 547년경, 모자이크, 산비탈레성당, 라벤나
제대 왼쪽 벽면의 ‘유스티니아누스황제와 수행원들’을 보면 황제의 머리 뒤에 원형의 후광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생존한 사람에게는 원래 정사각형 후광을 사용해야 하는데 황제권력의 신성성부여를 위해 원형을 사용하고 있다. 성찬식에 사용할 밀떡을 들고 있는 황제의 왼쪽에는 막시미아누스주교가 오른쪽에는 벨리사리우스장군이 서있다. 이것은 성속 모두의 지배권을 지닌 황제의 권력을 상징한다. 절대 권력자인 황제는 오른 발로 신하의 발을 밟고 있다. 병사들의 방패에 새겨진 라바룸 십자가는 라벤나 탈환으로 로마제국 재통일의 위업을 이룩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콘스탄티누스대제의 후예임을 나타낸다. 열 두 명의 수행원들은 열 두 사도를 연상하게 한다.
(사진 2) 테오도라황후와 시녀들, 547년경, 모자이크, 산비탈레성당, 라벤나
제대 오른쪽 벽면의 ‘테오도라황후와 시녀들’에서는 성체성사에 사용될 포도주를 황후가 들고 있다. 그녀의 머리 뒤에도 후광이 나타나는데 자주색(황실의 색) 의상 하단의 옷자락에 동방박사가 새겨져 있음으로 황후를 성모와 관련짓고 있다. 여성들의 행렬은 휘장 밖의 분수가 있는 외부에서 대기하다 남성들의 행렬을 뒤따르는 것으로 묘사됨으로 비잔틴사회 내에서 여성들의 지위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부동(不動)의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물상들은 사실은 동방정교회 전례(성체성사)를 시작하는 행렬을 묘사한 것이다. 전례행렬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인 제일 앞에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복음서를 사제가 들고 있으며 다른 사제는 향로를 흔들면서 복음서를 호위한다. 그 다음으로 막시미아누스주교가 십자가를 들고 들어온다. 의도적으로 그림의 중앙에 배치된 황제는 주교 다음으로 성찬식에 사용될 밀떡을 들고 따라 들어온다.
이 행렬은 제대 뒤 반원형 앱스(Apse) 벽면의 ‘우주위에 좌정한 그리스도’에게로 향하는 도상으로 되어 있다. 이 장면을 통해 동방정교회의 전례가 비잔틴미술을 산출한 자리임을 알 수 있다.
(사진 3) 우주 위에 좌정한 그리스도, 모자이크, 산비탈레성당 앱스(Apse, 후진) 벽면, 라벤나
3. 그런데 앱스 중앙 벽면모자이크의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형 후광에 싸인 채 일곱 개의 봉인과 관을 손에 든 수염이 없는 젊은이로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그리스 신화의 젊은 태양신 아폴론의 모습에서 차용한 것으로 그리스도의 영원한 젊음을 상징한다. 카타콤(Catacomb) 프레스코벽화에 묘사된 선한 목자상과 유니우스 밧수스의 석관 등에 나타난 초기 기독교 그리스도 도상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사진 4 우주 위에 좌정한 그리스도, 세부, 모자이크, 산비탈레성당 앱스, 라벤나)
초기 비잔틴 미술에서 제단정면 앱스 벽면에 있던 그리스도 도상은 9세기 후반 성상논쟁(726-843) 종결 후 교회 중앙의 등근 돔(천장)의 원형에 위치하고 그리스도 도상이 있던 이 자리에는 성모자상이 놓여진다. 이로써 만물의 통치자이며 우주의 지배자인 그리스도(Christ Pantocrator)가 전례에 참여한 회중들을 하늘로부터 바라보며 감싸 안는 공간이미지가 형성된다.
(사진 5 성모자상, 867년, 모자이크,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 앱스, 이스탄불)
(사진 6 우주의 지배자 그리스도 (Christ Pantocrator), 14세기, 모자이크, 코라교회,이스탄불)
회중들의 기도는 벽면에 있는 성인들과 사도들을 거쳐 정면의 성모자에게 전달되고 다시 맨 위의 그리스도에게로 이어지는 도상체계를 갖게 되는데 이것은 전례신학에 따른 것이다.
4. 비잔틴 회화를 대표하는 것은 모자이크(mosaic)이다. 모자이크기법은 로마 제국 당시 이미 바닥 장식 등으로 사용되었으나 사실주의 미술을 추구한 당대의 경향으로 건물 내부 장식과 전달매체로서 프레스코벽화가 더 선호되었다.
하지만 비잔틴 미술에서는 더 이상 사실적 환영의 묘사가 아닌 신성하고 신비한 기독교적 이미지를 전달하기 위해 모자이크 회화가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표면에 그려진 밑그림 위의 시멘트에 색유리 조각을 정육면체로 잘라서 배열하는 테세라(tessera) 기법과 황금색을 배경(gold background)으로 삼음으로써 교회 건축이 3차원의 공간에서 추구한 빛의 효과를 평면 공간에서도 추구할 수 있었다.
정신적이고 신비한 빛을 추구하는 비잔틴 미술의 경향은 향후 서방교회의 로마네스미술과 고딕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유한한 현실 공간을 넘어 초월적인 무한한 공간을 암시하는 황금색 배경은 기독교미술이 표현하고자 하는 영적인 신비를 전달하기에 적절하였다.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대성당(San Marco) 내부의 모자이크는 영적인 천상의 공간으로서의 비잔틴미술의 이미지를 잘 나타낸다. 베네치아는 당시 동방과의 경제적 연계를 밀접히 가졌던 도시로 비잔틴제국의 문화적, 종교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다.
(사진 7 산마르코성당 대성당(San Marco) 내부, 1063년 착공, 베네치아)
5. 산비탈레 성당은 동방정교회의 중앙집중식 교회건축양식(central-plan church)의 원형이다. 이 성당은 팔각형의 기초 위에 8개의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원형의 돔을 축조했는데 서방교회의 장방형의 바실리카형식(basilica-plan church)과 달리 비잔틴건축에서는 돔을 얹는 중앙 집중식 설계가 교회건축을 지배한다. 이 성당은 돔 건축의 실현이라는 건축공학적 관점에서 로마의 산타 코스탄차 묘당(Santa Costanza)과 성 소피아 대성당의 중간에 위치한다.
(사진 8 산비탈레 성당(San Vitale), 526-547년, 라벤나)
반면에 같은 시기 라벤나 근교에 세워진 ‘클라세의 성 아폴리나레 교회’(Sant 'Apollinare in Classe, 535-549)는 바실리카 형식의 교회건축으로 여전히 초기 기독교 건축의 전통을 따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6. 성스러운 지혜(Hagia Sophia)라는 의미의 성 소피아대성당은 콘스탄티노플의 영광을 위해 유스티니아누스황제가 봉헌한 교회로서 중앙집중식 비잔틴 건축의 정수를 보여준다.
(사진 9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 대성당, 532-537년, 이스탄불)
바실리카의 장축 개념과 중앙 집중 양식을 혼합한 성 소피아 대성당은 초기 기독교 이후 돔 건축 발전의 절정이다. 이것은 네 면의 벽체 위에 바로 돔을 얹는 초기 방식이 아닌 네 면의 아치 위에 돔을 얹고 그 사이를 벽돌로 채우는 삼각궁륭(Pendentive) 공법이 개발됨으로 가능하였다. 이로써 드높이 놓여 있는 돔과 함께 내부가 넓고 확 트인 느낌을 주게 되었다.
수학자 트랄레스의 안테미우스와 밀레투스의 이시도루스에 의해 지어진 높이 55미터, 돔 직경 30미터, 그리고 71×77미터의 평면을 지닌 이 성당의 진면목은 돔 하단부에 위치한 40개의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의 효과이다.
중앙의 거대한 돔은 회당 벽의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으로 인해 프로코프(6세기의 역사가)의 표현처럼 ‘황금의 사슬로 하늘에 매달려 공간을 덮고 있는 양’ 마치도 하늘에 떠 있는 듯 환상이 들게 하였다. 이제 대성당 안은 각도를 달리하여 사방에서 들어오는 빛의 유희로 인해 물질적인 중력감을 탈피한 비물질화된 영적인 공간이 되었다. 공간이 정신적인 것이 된 것이다.
유스티니아누스황제는 이 교회를 봉헌하며 “솔로몬이여 내가 당신을 이겼노라” 라고 외쳤다고 한다. 이제 콘스탄티노플은 로마보다 우세한 어머니를 능가한 딸이 되었다.
(사진 10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 내부, 532-537년, 이스탄불)
비잔틴제국의 멸망이후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은 이슬람사원으로 전환되어 킬리세-자미(Kilise-Cami)로 사용되어오다가 현재는 아야소피아(Ayasofiya) 박물관이 되었다.
7. 동방정교회의 전례와 밀접한 연관을 가진 성상(이콘, Icon)은 지나친 성상공경으로 인해 성상파괴논쟁(Iconoclasm)을 유발한다. 성상논쟁(Bilderstreit)은 우상숭배를 금하는 신학적인 이유 외에 왕권강화와 제국의 결속을 위해 수도원세력을 견제하고자 하는 정치, 경제적인 동기에서 비롯되었다.
레오 3세 황제의 성상금지칙령(726년)으로 시작된 성상논쟁은 843년 성상이 다시 허용되기까지 성상반대파(iconoclast)와 성상옹호파(iconophile, 성상을 사랑하는 자혹은 iconodule, 이콘의 노예) 간에 격렬한 논쟁을 거쳤다.
콘스탄티누스 5세 황제를 비롯한 성상반대파 주장의 주요 논거는 십계명의 제 2계명과 칼케돈신조였다. 반면에 성상파의 이콘 변호에서 가장 중요한 신학적 토대는 성육신에 근거한 그리스도론이었다. 결국 다마스쿠스의 요안네스(Ioannes of Damascus) 등의 성상파가 최종 승리를 거둠으로 성상은 재허용되고 이후 동방정교회의 이콘신학이 형성됨으로 비잔틴 미술은 제 2 황금기(850-1200년)를 맞이한다.
8. 6세기에 제작된 이콘 ‘그리스도와 성 메나스’(Christ and St. Menas)는 초기 이콘이 지닌 오리엔탈적인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배경으로 된 주황색 사막 같은 하늘과 푸른 언덕은 나일강의 풍경을 그린 듯하다. 그리스도는 수도원장 메나스를 천국으로 인도하기위해 한손을 그의 어깨에 두르고 있는 필안트로포스(philantropos, 인간을 사랑하는 자)로 묘사되어 있다.
(사진 11 그리스도와 성 메나스, 6세기, 목판에 템페라, 루브르박물관, 파리)
같은 시기에 카타리나수도원에서 제작된 왼손에는 복음서를 들고 오른손으로는 하늘과 땅을 축복하는 자세의 '축복하는 그리스도'(Blessing Christ)는 몇 가지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우선 그리스도 도상이 머리가 짧고 수염이 없는 젊은이의 모습이 아닌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라고 불리는 머리가 길고 수염이 있는 나이든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초기 기독교와 비잔틴 미술에서 아폴론유형의 그리스도 도상과 신들의 아버지인 제우스유형의 그리스도 도상이 함께 통용되어 온 것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는 이교도의 신들보다 더 강력한 존재로 묘사하기 위해 고대 고전미술의 사실주의 기법이 사용되고 있는 점이다. 초인간성을 지닌 강력한 이미지의 이 도상은 후에 우주의 지배자 그리스도(Christ Pantocrator)의 모티브가 된다.
(사진 12 축복하는 그리스도(Blessing Christ), 6세기, 목판에 납화, 성 카타리나수도 원, 시나이, 에집트)
성상파괴논쟁 이후의 비잔틴미술은 더욱 성스럽고 교리와 밀접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리스 다프니의 도르미티온교회의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그리스도’는 시간과 공간의 묘사가 최대한 배제되어 있지만 분명한 교리적 가르침을 전달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나오는 물과 피는 생명을 주는 세례와 성체 성시를 의미한다. 발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십자가 아래에 있는 아담의 해골을 적시고 있다. 예수의 피로 인해 아담의 원죄가 씻기는 교리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사진 13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11세기 말, 모자이크, 도르미티온교회, 다프니, 그리스)
이 교회의 천장에는 온통 금빛으로 둘러싸인 돔의 중앙에 존엄한 표정의 ‘우주의 지배자 그리스도’(Christ Pantocrator) 도상이 자리 잡고 있다. 십자가에서 수난당하는 그리스도의 모습과 부활 후의 존엄한 지배자로서의 모습이 동시에 경배되고 있는 것이다.
(사진 14 우주의 지배자 그리스도(Christ Pantocrator), 1080-1100년 경, 모자이크,도르미티온교회, 다프니, 그리스)
성모 마리아의 비통함을 묘사한 네레지 성 판텔레이몬 교회의 ‘애도’는 12세기에 새로운 감성주의가 비잔틴미술에 활기를 불어 넣은 것을 알려주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그리스도의 몸을 감싸기 위해 고운 베를 가져온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발밑에서 슬피 울고 애제자 요한은 몸을 구부리며 그리스도의 손에 입을 맞추고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서방교회에서처럼 속죄의 의미에서 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육체를 입으심’의 신비와 연관시키고 있다.
(사진 15 애도, 1164년, 프레스코, 성 판탈레이몬 교회, 네레지, 마케도니아)
시칠리아 몬레알레 성당 앱스의 모자이크 ‘우주의 지배자 그리스도’(Christ Pantorcrator, 1190년 경)는 시칠리아의 새로운 지배자 노르만인들이 친교황정책을 견지하면서도 문화적으로 지역의 비잔틴전통을 수용한 경우이다. 같은 시기 영국을 정복한 노르만인들이 앵글로색슨 토착문화를 억제하고 대륙의 로마네스크양식(노르만양식)을 도입한 경우와 대조적이다.
장엄하고 강인한 인상의 그리스도의 왼손에 들린 성서는 그리스어 뿐 만이 아니라 라틴어로도 적혀 있어 서유럽 지역에서의 비잔틴문화의 수용을 나타낸다. 1054년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열이 있은 후에도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대성당(1063년)과 함께 비잔틴문화가 서유럽에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경우라 하겠다.
그리스도가 중앙의 돔이 아닌 앱스(Apse, 후진)에 위치하고 있으나 그 아래에 성모자상이 배치됨으로 비잔틴 미술 특유의 도상 체계를 따르고 있다.
(사진 16 우주의 지배자 그리스도, 1190년 경, 모자이크, 몬레알레 성당, 시칠리아)
13세기 말 콘스탄니노플에서 제작된 ‘옥좌에 앉은 성모자상’은 비잔틴미술 전통의 정형화된 엄격성에도 불구하고 옷 주름이나 얼굴 및 몸짓의 묘사에 고대 고전미술이 이룩한 성과가 보존된 작품이다.
비잔틴교회의 성상은 일체의 주관적인 기법을 배제하고 성상의 패턴과 규격을 오랜 전통에 따라 규제하였다. 이러한 엄격성이 오히려 동시대 서유럽에서 진행되던 고딕미술보다도 그리스와 헬레니즘 미술이 지닌 자연주의적 성격을 더 유지하게 하였다. 그럼으로써 곧 도래할 르네상스를 예비하고 있는 것이다.
(사진 17 옥좌에 앉은 성모자상, 1280년경, 목판에 템페라, 콘스탄티노플화파, 위싱 턴 국립미술관)
비잔틴정교회는 성상파괴논쟁 종결 이후 9세기 중반부터 내부문제를 해결한 후의 에너지를 동유럽과 슬라브족에 대한 선교로 분출한다. ‘블라드미르의 마돈나’(1125년 경)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제작되어 이 시기에 러시아에 전해진 작품이다.
이 성상은 비잔틴 고유의 황금빛 배경 앞에 검고 푸른 옷을 입은 성모와 황금색 실선으로 명암이 처리된 옷을 입은 아기예수가 다정한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전의 성모자상과 달리 다정하게 볼을 비비는 모습이 휴머니즘적인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동시에 그리스도의 죽음을 알고 슬퍼하는 성모의 표정에서 비잔틴 미술 특유의 종교성과 서술성이 잘 나타나 있는 작품이다.
(사진 18 블라드미르의 마돈나(Theotokos of Vladmir), 1130년경, 목판에 템페라, 콘스탄티노플화파, 트레티야코프미술관, 모스크바)
안드레이 루블레프의 '삼위일체'는 기독교화(988년)된 러시아가 낳은 가장 유명한 성상화이다. 아브라함의 영접을 받고 있는 세 명의 천사를 통해 삼위일체를 형상화하고 있다. 차분하고 온화한 색채, 부드러운 형태와 조화로운 구성 등은 러시아성상의 지역적 특성을 잘 드러내며 비잔틴 향식을 넘어서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진 19 안드레이 루블레프, 삼위일체, 1420년 경, 목판에 템페라, 트레티야코프미술관, 모스크바)
9. 비잔틴제국이 오스만 투르크족에 의해 정복당한 후 콘스탄티노플은 이스탄불로 개명되고 제국의 종언을 고한다. 그러나 비잔틴미술은 모스크바를 '제 3의 로마'라고 자처한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 정교회에 의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임재훈목사
jejastgt@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