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열기 속으로] ‘눈높이 팔색조 지휘봉’ 通하다
입력 2014-05-31 02:40
■ 해부 ‘홍명보 감독의 리더십’
“한 마리 사슴이 이끄는 사자들의 군대보다 한 마리 사자가 이끄는 사슴들의 군대가 더 위협적이다.”(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필립왕)
2012 런던올림픽 남자 축구 한국과 영국의 8강전에서 이 격언은 진실임이 증명됐다. 스튜어트 피어스(52) 영국 감독은 경기 전 인터뷰 때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한국 선수들을 모른다.”
반면 한국의 홍명보(45) 감독은 이런 말로 우리 선수들의 용기를 북돋웠다.
“영국은 단합이 안 돼. 우리가 조직력으로 맞서면 충분히 이길 수 있어.”
결과는 한국의 승리였다. 홍 감독의 리더십 덕분에 한국 축구는 런던올림픽에서 사상 첫 메달(동메달)을 따내는 쾌거를 이뤘다.
홍 감독에게 선수들은 자신의 모든 것이다. 때로는 자상하게 보듬고, 때로는 단호하게 몰아친다. 선수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언제든 등 뒤에 숨겨둔 칼을 뽑는다.
홍 감독의 ‘팔색조 리더십’을 단적으로 보여준 일화 한 가지. 런던올림픽 일본과의 3∼4위전을 하루 앞두고 열린 대표팀의 미팅 때였다. 일본-멕시코전 경기 영상을 지켜보던 홍 감독이 갑자기 영상을 정지시키라고 했다.
“자, 내일 만약 저렇게 주인 없는 볼의 헤딩 경합 상황이 나오잖아.”
잠시 뜸을 들인 그는 놀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선수들에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갖다 부숴 버려!”
적에게 자비를 베풀지 말라는 홍 감독의 명령에 선수들은 바짝 군기가 들어 우렁차게 대답했다.
“예.”
선수들은 매너 있는 경기가 아니라 무자비한 경기를 해야 된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겼다. 경기 당일 홍 감독은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 너희가 죽으려고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자, 전쟁이다. 어떻게든 이기는 거야”라고 말했다. 승부는 사실상 경기 전에 결정나 있었다.
홍 감독의 리더십을 알 수 있는 또 다른 사례는 바로 박주영(29)의 병역 연기 기자회견을 꼽을 수 있다. 자칫 역풍이 자신에게 향할 수도 있었지만 홍 감독은 “감독으로서 내가 갖고 있는 철학이 있는데, 가장 중요한 건 팀과 선수를 위한 감독이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선수가 필드 안이나 밖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언제든 선수들과 같이하겠다는 마음이고, 그래서 기자회견에 참석했다”고 밝혔다. 박주영은 런던올림픽에서 맹활약하며 자기 대신 군대에 가겠다고 했던 홍 감독에게 보은했다.
홍 감독은 선수들에게 비장한 장수의 모습만 보여주진 않는다. 김광석, 최호섭의 노래를 좋아하는 그는 몇 년 전부터 ‘2NE1’ 같은 걸그룹 노래를 즐겨 듣고 있다.
“조카뻘 되는 선수들의 문화를 알고 공부해야 했습니다.”
그는 어린 선수들과 소통하기 위해 인기 드라마도 즐겨 본다.
잘 정비된 팀과 그렇지 않은 팀의 차이는 딱 한 가지다. 팀이 하나로 잘 뭉쳐져 있느냐, 아니면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느냐다. 선수들이 감독을 존중하지 않고, 감독이 선수들을 불신하는 팀은 자멸할 수밖에 없다. ‘홍명보호’의 장점은 감독과 선수들 간 강한 결속이다. 대표팀 선수들과 코치들은 가슴속에 열정을 불어넣은 ‘보스 홍명보’를 위해서라면 불 속이라도 뛰어들 태세다.
국민들은 사상 첫 월드컵 원정 8강을 달성하기 위해 30일 미국 마이애미 전지훈련을 떠난 홍 감독에게 ‘팔색조 리더십’을 통한 또 한번의 유쾌한 반란을 기대하고 있다.
김태현 기자 tae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