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한 달] 절망·자책으로 더 커지는 상처… 또다른 ‘비극’ 우려
입력 2014-05-16 03:32
현실이 된 ‘트라우마’…유가족들 실태와 지원 현황
시간이 해결해주지 않는 일도 있다. 세월호 침몰 한 달. 시간이 독(毒)이 되어 유가족들의 삶을 짓누르고 있다. 그래도 장례를 치를 때까지는 어떻게든 버텼다. 진짜 갈등은 장례 후 시작된다. 텅 빈 집에 돌아가면 아이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마음은 아이를 기다리고 머리는 그럴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렇게 절망하고 자책하다 남은 가족들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힌다.
◇절망·자책, 현실로 나타나는 유가족 트라우마=유가족 심리지원을 전담하는 ‘안산 정신건강트라우마센터’의 관계자는 “장례 이후가 가장 힘들다. 힘을 합쳐서 이 사태를 이겨내자던 마음이 힘을 잃고 서로에게 화를 내고 탓을 하는 일이 많아지는 시기”라고 말했다.
남동생을 잃은 한 여학생은 얼마 전 부모에게 “나도 차라리 죽어 버릴 거야”라고 말했다. 부모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괴로웠다. 어머니는 매일 집에서 통곡했다. 밤에는 아버지 술 냄새가 진동했다.
심한 자책감도 유가족을 괴롭히고 있다. “내가 아이를 7살에 학교를 보내서 이렇게 됐다. 다 내 탓이다.” “마지막 통화에서 뛰어내리라고 했어야 했다. 내가 살릴 수 있었는데 못 살렸다.” 자책하길 멈추고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을 그만두는 게 중요하다. 심리지원팀은 부모 탓이 아니라는 명백한 사실을 납득하고 받아들이도록 돕는 데 집중하고 있다.
부부싸움이 잦아진 경우도 많다. 아내는 울고, 남편은 윽박지르는 식이다. 심민영 국립서울병원 심리적외상관리팀장은 “이럴 때 남편분께는 ‘마음껏 울고 충분히 슬퍼해야 마음에 굳은살이 생긴다’고 말하고, 아내분께는 ‘의지가 되는 사람도 만나고 바깥 공기도 쐬는 게 좋다’고 다독이는 게 바로 심리지원”이라고 설명했다.
◇“괜찮다”고 말하면 “도와 달라”는 신호=지난주 초 트라우마센터 심리지원팀은 안산의 한 장례식장을 찾았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에게 도움을 주겠노라고 말을 건넸고 발인 나흘 뒤에 만나기로 약속했다. 이 여성은 약속 하루 전날인 지난 9일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병원에 실려갔다.
생명에 지장이 없어 다행이었지만 유족들 심리지원이 지체할 수 없는 시급한 일임을 재확인시킨 사례였다. 센터의 한 관계자는 “보통 발인하고 3∼4일 뒤 만나자고 해야 마음을 연다. 초기에 기회를 놓치면 첫 상담 시기는 장례 며칠 뒤로 늦어질 수밖에 없다”며 “사고가 벌어진 시점부터 심리지원에 들어가는 게 가장 바람직한데 놓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트라우마센터는 15일 현재 177가구에 대해 심리지원을 진행하고 있다. 31가구는 거부했다. 유가족이 심리지원을 거부할 때는 “괜찮다”거나 “다 필요 없다”고 말한다. 전문가들은 두 경우 모두 도와 달라는 신호라고 보고 있다. 심민영 팀장은 “아무런 심리지원을 받지 않는 것 자체가 위험한 상황”이라며 “‘괜찮다’는 말에 안심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계속 연락을 취하고 있다”고 말했다.
심리지원팀은 상담을 받고 있는 유가족 가운데 3분의 1을 ‘위험군’으로 판단하고 있다. “죽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고 우울증이 만성화될 징후가 역력하다. 일부 가족들은 이런 상황에 생계까지 걱정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문전박대에도 계속 문 두드려야=남편과 이혼하고 외아들을 키우던 A씨는 장례를 치르고도 집에 가지 못했다. 아들과 단 둘이 살던 집에 도저히 혼자 갈 용기가 안 났다. 심리지원팀이 병원에 입원한 A씨를 찾아갔다. 첫 반응은 “필요 없으니 돌아가 달라”였다. 심리지원팀은 포기하지 않았다. 자꾸 찾아가 얼굴을 익히고 짜증을 내도 받아줬다.
그렇게 계속 문을 두드리니 A씨도 마음을 열었다. 아들과의 추억을 하나둘 꺼냈다. “덩치 큰 아들 녀석이 ‘엄마는 꼭 아기 같다’는 말을 많이 했어요. 다정한 아이였지요.” “우리 아들은 여름에도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는데 차가운 곳에서…. 억장이 무너집니다. 억장이.” 울기도 하고 웃기도 했다.
A씨에 대한 심리지원을 맡고 있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그렇게 함께 마음을 정리해나가는 게 치유의 과정”이라고 말했다.
문수정 기자, 안산=황인호 기자 thursda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