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창준 (7) 유학생 동아리 회장 선거 출마해 당당히 당선

입력 2014-05-15 02:14


유학 온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여러 나라 유학생들이 모이는 동아리에 가입했다. 국제관계를 연구하는 모임이었는데, 영어를 잘 못하는 나로서는 토론내용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학생들이 다양한 의견을 내고 토론을 벌이며 무언가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식당에서 서빙을 하다가 손님한테 음식을 엎질러 쫓겨나던 날에도 모임에는 빠지지 않을 만큼 열심이었다.

그 모임에서는 각 나라 외교정책을 두고 토론을 벌였다. 주로 2차 세계대전 후의 새로운 세계질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 때때로 코리아가 등장했다. 나는 토론을 들으며 생전 처음으로 세계 속의 코리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일제 강점기 때 태어나 식민지 교육을 받았고 6·25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우리나라의 비극적인 역사와 나의 존재를 함께 놓고 고민해본 적이 없다. 부정선거에 항거해 목숨을 내걸고 구름 떼처럼 경무대로 치닫던 학생들의 무리를 보고서도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나는 먼 미국 땅에서 깨달았다. 아, 얼마나 부끄러운 청춘이었던가. 그러던 어느 날 동아리 회장을 새로 뽑는다고 했다. ‘내가 나가봐야지.’ 새로 들어온 신입회원의 선언에 다들 생뚱맞은 표정이 역력했다. 그런데 난감한 일이 벌어졌다. 정견발표를 준비해야 했다.

나는 한국에서 온 유학생이라며 친절하게 대해주던 한 미국인 여학생을 찾아갔다. 다짜고짜 그녀에게 정견발표를 대신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흔쾌히 승낙했다. 며칠 뒤 학교 신문에는 나와 그녀 사진이 크게 실렸다. 교내에 화제를 불러 모으며 나는 동아리 회장으로 당당히 당선됐다. 그런데 막상 각종 동아리 행사 때마다 회장과 함께 대변인처럼 늘 따라나서야 하는 일이 그 여학생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우리의 이상한 파트너십은 2년 임기 가운데 3분의 1도 채우지 못하고 7개월 만에 깨져버렸다. 이를 계기로 영어를 제대로 배워야 한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늦은 밤 집에 돌아오면 혼자서 영어를 중얼거렸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V와 F, TH, Z 발음은 어려웠다.

여러 방법으로 애를 쓰다가 화장실에 앉아 신문을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좁은 화장실 벽에 내 목소리가 부딪혀 내 귀로 다시 들어와 어설픈 내 발음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신문에 실린 주요 기사를 몇 번씩이나 소리 내 읽다보니 나도 모르게 기사 전체가 통째로 외워졌다. 그렇게 영어공부에 매달리자 유학생활 1년 만에 영어실력이 부쩍 늘었다. 하루가 다르게 귀가 열리고 말문이 터졌다. 그래도 특유의 악센트는 여전히 남아 있고 아직도 서툰 부분이 있다.

그 무렵 지역 신문사 보급소에 새 일자리를 얻었다. 새벽시간을 이용해서 일하니 낮 시간에 공부하기가 한결 쉬운 데다 수입도 좋은 편이었다. 신문 배달을 하는 동안 단 하루도 시간을 어긴 적이 없었다. 그걸 좋게 본 때문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구역 책임자가 됐다.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수입이 늘어 더 이상 병원 청소는 하지 않아도 됐다.

신문 보급소 일을 하면서 내가 꿈꾸던 남가주대학 토목공학과 2학년에 편입했다. 꿈이 실현되고 있는 것 같았다. 남들은 어려서부터 원대한 꿈을 가져야 한다고들 충고한다. 하지만 그때 내 삶은 원대한 꿈을 갖고 살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저 코앞에 닥친 현실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그러나 어렵다고 주저앉아 본 적은 없었다. 작은 목표가 완성됐을 때 조금 더 큰 목표를 세워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정리=박재찬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