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홍성욱] 안전장치들은 언제 실패하는가

입력 2014-05-13 02:45


“해운사와 안전기관들이 서로 유착됐을 때 제도적 안전장치들은 사고를 막을 수 없어”

세월호 사고를 보면서 국민들이 느낀 참담함은 총체적이다. 300명이 넘는 사망자와 실종자들, 특히 그중 3분의 2가 꽃다운 10대 학생이라는 사실만 해도 가슴을 후벼낼 정도로 참담했다. 여기에 지난달 16일 사고 직후 초동 구조된 170여명을 제외하고는 단 한 명도 구조되지 못했다는 사실이 비참함을 더했다. 깊은 물속에 가라앉은 승객 대부분이 ‘객실에 있으라’는 방송에 따라 객실에 머물렀던 사람이라는 사실도 그랬다. 며칠 동안 물 위에 거꾸로 떠 있던 배에 에어포켓이 있고, 그 속에 생존자가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은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서서히 사라졌고, 희망이 사라진 자리는 슬픔과 울분으로 채워졌다.

사건의 추이가 드러나면서 국민들은 이렇게 큰 인명피해를 가져온 사고의 원인이 해운사가 돈을 벌기 위해 무리하게 화물을 싣고, 그만큼 배의 균형을 잡아주는 평형수를 뺀 데 있다는 사실에 치를 떨었다. 그런데 이것만이 아니었다. 자신들만 빠져나오는 데 급급했던 선장과 선원들, 오래된 배를 사와서 무리하게 개조하는 것을 용인한 제도, 선사 측에만 통보된 안전검사 결과, 과적을 지시한 해운사와 이를 눈감아준 한국해운조합, 있으나마나한 선원 안전교육과 안전장비들, 위기 상황과 구조 작업에 대해 무지한 해경, 경력조차 불분명한 구조업체 선정, 해수부 마피아의 독점과 유착 등에 대한 보도가 이어졌고, 이는 국민들의 슬픔을 분노로 바꾸었다.

바다건 육지건 사고는 항상 일어난다. 사고가 전혀 없는 교통 시스템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사고와 위험을 줄이기 위해 다양한 안전장치를 만들어놓는다. 기술적인 것이든 제도적인 것이든 안전은 서로 독립적인 안전장치들에 의해 확보된다. 안전장치를 여러 개 마련했다고 해도 이것들이 서로 다 연결되어 하나가 오작동할 경우에 다른 것도 오작동한다면 안전장치로서 충분치 않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번 세월호 사고가 특히 더 참담한 이유는 안전장치가 잘 작동했다면 전원 구조가 가능했을 사고가 엄청난 희생을 낳은 사고로 커졌다는 사실에 있다.

배에는 배의 안전을 유지하는 평형수, 선원과 승객에 대한 안전교육,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구명벌 등이 안전을 위한 장치로 마련되어 있다. 그런데 세월호는 100번이 넘게 과적 운항을 했고, 선사는 선원들 안전교육에 채 50만원도 쓰지 않았다. 구명벌은 계속 재점검을 해야 정상적인 사용이 가능한데 이 역시 회사가 무시했음이 분명하다. 여러 안전장치들은 회사가 손에 잡히는 이윤만을 추구할 경우 이렇게 한꺼번에 오작동할 수 있다.

회사의 과욕을 견제하기 위한 기구도 있다. 그런데 선원 안전교육과 입출항 안전점검을 하는 해운조합의 운영비는 선사들이 낸다. 안전을 준수하기 위해서는 선사로부터 독립적인 감시기관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는 추가적인 비용이 발생한다. 이번 사건에서 드러났듯 관련 단체 수장이나 간부를 전직 관료들로 임명하면 인맥을 이용해 여러 일을 쉽게 만들면서 추가적인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해운사와 독립적으로 작동해야 할 안전기관들이 이렇게 서로 유착되었을 때 제도적 안전장치들은 사고를 막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고 앞에 무력하다.

이번 사고 전에 선원과 해양 관계자들은 “바다는 우리가 가장 잘 안다”고 큰소리쳤다. 바다를 잘 알지는 몰라도 이들의 전문 지식이 배의 안전을 보장해주지는 못했다. 전문성만을 앞세운 제도적 안전장치가 독립적으로 작동하지 못하는 일은 도처에서 일어난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후 원자력에 대한 국민들의 불안이 높아지자 이명박정부는 원자력안전위원회를 만들었다. 위원들은 시민대표를 포함했지만 친원전 성향이 강한 원자력 전문가가 위원장과 위원의 다수를 차지했다. 원자력과 관련된 많은 기관에는 ‘원자력마피아’의 인맥이 거미줄처럼 포진하고 있다. 이윤의 추구와 이해관계의 유착이 독립된 안전장치들을 무력화하는 주범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우리 사회는 크게 터질 위험을 여럿 안고 있는 위험사회인 것이다.

홍성욱 서울대 교수·생명과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