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빚 불태워 빛으로’… 한국판 ‘롤링 주빌리’ 시동
입력 2014-05-12 02:30
‘희망살림’ ‘에듀머니’ 성금 모아 부실채권 소각운동
“귀하의 빚이 탕감되었습니다. 이날 이후 어떠한 채권자나 신용정보사로부터도 위 채권에 대한 추심은 전면 금지될 것입니다…. 이 안내문이 전달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시민단체 희망살림과 사회적기업 에듀머니는 지난 7일 전국 각지의 장기 채무자 117명에게 부채 탕감을 알리는 통지문을 발송했다. 이들은 대부업체에 오래도록 대출금을 연체한 장기 채무자들의 채권 164건을 사들인 뒤 지난달 10일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 앞에서 불태워버렸다. 4억6700만원을 넘는 빚을 구매하려고 희망살림과 에듀머니가 쓴 돈은 1300만원(2.7%)을 조금 넘었다. 원금의 0.1%에 불과한 헐값으로 사들인 채권도 있었다.
희망살림 등이 채무를 탕감해준 이들 중에는 갓 30세를 넘긴 1983년생도 있었다. 그는 20세가 되던 2002년부터 카드빚을 졌고, 10년 넘게 독촉에 시달렸다. 그가 지긋지긋한 빚에서 해방된 것을 알아차렸는지는 불분명하다. 11일 희망살림의 김지희 사무국장은 “대부업체로부터 안내받은 주소로 우편 통지문을 발송했지만 회신을 받은 사례는 아직 한 건도 없다”고 말했다. 채권 추심을 피해 숨어 지내는 이들인 까닭에 희망살림은 안내문 말미에 “전달되길 간절히 바란다”고 썼다.
대부업체의 장기 채권을 매입해 소각하는 풍경은 익숙하다. 2012년 미국에서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운동이 벌어질 때 시민들은 성금으로 매입한 빚을 불태워 환호하며 이를 ‘롤링 주빌리(Rolling Jubilee)’라고 불렀다. 어원은 기독교의 전통에 있다. 구약성서 레위기에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는 말과 함께 등장한 ‘희년(禧年·주빌리)’을 따다 썼다. 수년째 미국의 부채타파운동을 진행 중인 롤링 주빌리 홈페이지(rollingjubilee.org)는 “성서시대 주빌리 전통이 오늘날에도 이어질 수 있다” “이 축제는 소외된 99%를 위한 시간”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들은 빚 탕감에 쓸 돈으로 다시 70만1317달러를 모아둔 상태다.
롤링 주빌리는 한국으로 건너와 ‘공유경제’의 대명사인 크라우드펀딩(crowd funding)과 결합하고 있다. 크라우드펀딩 사업자인 굿펀딩에 따르면 희망살림과 에듀머니는 ‘시민의 시민에 의한 빚 탕감 프로젝트’를 내걸고 다음달 6일까지 3000만원짜리 크라우드펀딩을 진행 중이다. 후원 단위는 1만3000원과 3만9000원 두 종류다. 1만3000원으로는 1000만원, 3만9000원으로는 3000만원짜리 채권을 불태울 수 있다.
모금액은 대부업체의 채권 매입, 채무자 교육·상담 등에 쓰인다. 누구의 빚부터 불태울 것인지 명쾌한 기준은 없다. 다만 김 사무국장은 “악의적인 추심을 막기 위해 대부업체들도 거의 포기한 장기 채권을 매입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1997년 외환위기 직후의 카드빚들은 현재 부실채권 시장에서 헐값으로 거래 중이다. 펀딩에 참여한 투자자들에게는 보상으로 희망살림이 발간하는 정책 리포트, 에듀머니의 온라인 경제교육 수강권 등이 제공된다.
희년의 은혜를 좇는 이 운동이 고민할 부분은 끊임없는 도덕적 해이 논란이다. 김 사무국장은 “장기간 추심에 시달린 이들은 30대·40대가 대다수였다”며 “20대부터 빚 독촉에 노출됐다면 사회 적응이 어려웠을 것”이라고 롤링 주빌리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하지만 반대편에서는 “양심껏 빚을 갚아나가는 사람만 바보냐”는 항변이 여전히 크다. 파산·면책제도에 대해서도 악용 사례를 고발하는 목소리가 높다. 금융권 관계자는 “재기를 돕겠다며 정부가 진행하는 국민행복기금에 대해서도 사람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고 금융질서 혼란을 에둘러 비판했다.
Key Word-롤링 주빌리
Rolling Jubilee. 장기 채무자의 채권을 금융회사로부터 매입, 불태워 가혹한 채권 추심에 시달리는 채무자를 해방시켜 주는 사회운동. 2012년 11월 미국에서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운동이 벌어지던 당시 155억원어치의 부실채권을 불태운 것이 시초다. ‘롤링 주빌리’는 일정 기간마다 죄나 빚을 탕감해 주는 기독교 전통인 ‘희년’에서 비롯했다. 레위기 25장에서는 이스라엘인들이 50년마다 한 번씩 희년을 기념하도록 했다. 희년을 맞으면 노예로 팔렸던 사람들이 노예에서 풀려나고, 조상의 재산을 저당 잡혔던 사람들은 재산을 돌려받았다.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