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임영서 (11) 어머니와 ‘천안함’ 친구에 얽힌 닭갈비 이야기

입력 2014-04-28 02:10


나는 ‘죽이야기’ 브랜드 외에 닭갈비 브랜드도 갖고 있다. 그런데 내가 이 사업을 하게 된 특별한 사연이 있다. 어떻게 보면 슬프고 가슴 뭉클한 이야기다.

중학교 2학년 때 통학거리가 멀어 양평읍내에서 자취생활을 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우니 어머니가 1주일에 한 번씩 반찬과 쌀을 가지고 오셨다. 그런데 자취방 앞에 유명한 닭갈비집이 있었다. 서울에서도 사람들이 몰려와 문전성시였다.

한창 식욕이 왕성하던 그때 나는 저녁마다 방까지 풍겨오는 닭갈비 냄새에 아주 미칠 지경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가 장에 나가 쪽파를 팔아 힘들게 마련한 학비를 건네주시고 가셨다.

그날 저녁 나는 이 돈을 들고 닭갈비집으로 가서 실컷 사먹고 말았다. 어머니에게 혼나는 것보다 닭갈비가 더 나를 유혹했던 것이다. 다음주 토요일 반찬을 갖고 온 어머니에게 이실직고했다.

“야, 이놈아. 학비를 어떻게 마련했는데 그걸로 고기를 사먹냐. 철이 없어도 그렇게 없냐. 이놈아.”

화가 난 어머니는 내 등짝을 마구 때리셨고 잘못한 나는 그대로 맞고 서 있었다. 나를 때리신 어머니는 맘이 편치 않으셨는지 자취방에서 주무시고 다음날 아침 가시겠다고 하셨다. 아침에 나는 어머니의 낭랑한 기도소리에 잠이 깼다. 자는 내 이불 위에 손을 얹은 어머니는 울먹이며 기도를 쏟아내고 계셨다.

“하나님. 용서해 주세요. 제가 학비로 고기 사먹은 아들을 때렸습니다. 얼마나 고기가 먹고 싶었으면 그랬을까요. 부모가 되어 닭갈비도 못 사주면서 때린 죄를 용서해주시고 이 일로 영서가 상처받지 않게 해주세요. 우리 아들은 돈이 없어 자식을 때리는 부모 되지 않게 해주시고 꼭 부자 되게 해주셔서 나 같은 죄를 짓지 않게 해주세요.”

어머니의 굵은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도 벌떡 일어나 어머니를 껴안고 함께 울고 싶었지만 자는 체했다. 그 대신 나중에 꼭 닭갈비집을 차려 부자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고인이 된 친구 이창기와 얽힌 사연도 있다. 고교 3년을 같이 지낸 절친인 그와 나는 죽이 잘 맞아 뭐든지 함께 하며 깊은 우정을 나눴다. 졸업 후 전문대에 들어간 나와 달리 친구는 삼수도 실패하고 해군에 자원입대했다. 송별회를 닭갈비집에서 했는데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말했다.

“대학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잖아. 해군에서 근무 잘하고 나중에 대한민국에서 제일 맛있는 닭갈비집을 차리고 싶어. 그때 우리 가게 오면 공짜 닭갈비 얼마든지 줄게.”

우리는 호기롭게 웃었고 이후에도 그와 나는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2010년 3월 26일, 나는 내 눈을 의심하는 뉴스를 접해야 했다. 천안함이 폭침됐고 사망자 명단 가운데 친구 ‘고 이창기 원사’의 명단이 있었던 것이다. 해군에 계속 남아 직업군인이 됐던 친구가 천안함에 탔다가 사망한 것이다.

충격이 컸다. 친구를 좀 더 자주 만나고 하나님을 깊이 있게 전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했다. 그러면서 친구가 닭갈비집을 하겠다고 큰소리치던 것이 떠올라 그 꿈을 나라도 이뤄주고 싶었다. 또 어머니와의 사연도 작용해 이 분야 프랜차이즈 개발에 본격 나서게 되었다.

사실 내가 죽 사업도 바쁜데 새 브랜드를 하나 또 만드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와 친구 창기를 생각하면 이것은 꼭 해내고 싶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필용이 닭갈비이야기’다. 필용이는 내가 어렸을 때 집에서 쓰던 이름이다. 이 분야가 경쟁이 심해 가맹점 수는 많지 않지만 앞으로 해외 지점 개발에 적극 나서서 현지 직원들이 선교사의 몫을 감당할 수 있도록 지원할 생각이다. 그리고 그 꿈이 이뤄지도록 기도의 군불을 열심히 지피고 있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