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이경원] 오 캡틴, 마이 캡틴

입력 2014-04-26 02:44


데이비드 아코스타 대위는 내가 이등병으로 배치받은 미2사단 38포병 1대대의 본부중대장(포대장)이었다. 나는 그의 전령병(傳令兵)이었다. 중대장과 늘 함께하는 자리라서 선임들은 “네가 카투사의 얼굴”이라며 매사에 조심하길 당부했다. 하지만 전입을 신고할 때부터 그를 캡틴(대위)이라고 부르는 실수를 저질렀다. 장교를 부를 땐 계급을 말하면 안 되고 ‘서(Sir)’라 호칭한다고 거듭 배웠는데도 신병의 어리바리함이 어딜 가지 않았다. 사색이 돼서 안 되는 영어로 변명을 시작하는데 아코스타 대위가 빙그레 웃었다. “그 말이 참 듣기 좋다! 내가 너의 캡틴이니 날 믿고 따라와라!”

그는 여느 장교들과 달리 항상 앞장섰다. 팔굽혀펴기와 윗몸일으키기, 2마일(3.2㎞) 달리기로 구성된 정기 체력검정을 하면 중대에서 그를 이길 사람이 없었다. 한 달 가까이 이어지는 야전훈련에 불평하는 병사들 앞에서는 먼저 삽을 들고 땅을 팠다. 말끝마다 “마지막 1명이 남을 때까지 너희와 참호에서 함께하겠다”고 했다. 기독교 집안에 웨스트포인트(미 육사)를 나온 반듯한 엘리트이면서 병사들 앞에서는 육담(肉談)도 할 줄 알았다. 휴가 때 뭘 했느냐고 물으니 “마누라를 닦고 조이고 기름 치고 왔지!(차량정비 용어를 인용한 것)”라고 응수해 모두 한바탕 웃었던 기억이 있다.

내가 병장을 달았을 때 그는 미국 오클라호마주에 있는 부대로 전출 명령을 받았다. 동두천을 떠나기 전날 그는 연병장에 중대원들을 모아두고 “여러분과 끝까지 함께하지 못해 미안하다. 마음으로 한국을 수호할 것”이라고 말했다. 카투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줬는데, 내 차례에 이르러서는 “너의 캡틴으로 지내서 좋았지만, 이젠 진급도 해야 할 때”라고 유머를 했다. 때로 주한미군의 정당성을 회의하고 기지촌 여성들을 볼 때면 마음이 복잡해지던 군생활이었지만 아코스타 대위의 리더십만큼은 참 좋은 기억이었다.

신문사에 들어와서 보니 이곳에도 캡틴이 있었다. 사회부 경찰서 출입기자들의 팀장을 ‘캡’이라고 줄여 부르는데 존재감이 엄청났다. 신문기자들의 군기도 예전 같지 않다지만 내딴에는 군대에서 만난 캡틴보다 이 캡틴들이 더 무서웠다. 그때와 달리 호칭 실수는 안 했지만 매사가 혼날 일투성이였다. 네 보고는 얘기가 안돼 대부분 버린다, 짧은 기사인데도 엉성하다, 낙종(落種)했다는 걸 알지도 못하느냐, 출고한 그래픽은 난수표 같아 못 알아보겠다…. 자책에 빠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엄한 캡에게서 예고 없는 연락이 올까봐 쉬는 날에도 휴대전화를 손에 쥐고 화장실에 갔다. “예, 캡!” 하며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전화를 받으면 동석했던 취재원들이 우스워했다. 사회부를 떠난 뒤 캡과 사회인야구팀에 들었는데, 캐치볼을 하면 알 수 없이 손이 굳어 공을 똑바로 던져주지 못했다. 한 선배 기자는 큰 사고로 병원에 누워 부인을 못 알아보면서도 캡이 문안을 오니 벌떡 일어나려 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 광경에 참 미안했다고, 한때 그의 캡틴이었던 다른 선배가 조용히 말한 적이 있다.

무섭고 냉정한 캡들이었지만 어려운 때를 맞으면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기사가 괜한 항의를 받을 때, 부당하게 취재가 제한될 때, 캡들은 날 교육할 때보다 훨씬 크게 분노해줬다. 사건 현장에서 밤을 보낼 때에는 “수습이랑 소주 한잔 해라” 하며 돈을 부쳐주기도 했다. 한때 파업을 할 때에, 내 캡틴들은 “후배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캡의 사과라니 영 생경했다. 한 캡과는 파업 기간 중 여의도공원에 쳐 놓은 텐트에서 함께 잠을 잔 적이 있었다. 사실 자다 깨다 뒤척이기를 반복했다.

많은 캡틴 가운데 으뜸은 선장(船長)이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영한사전으로 새삼 ‘captain’을 찾아보니 대위나 항공기 기장, 운동 팀 주장에 앞서 맨 먼저 나오는 뜻풀이가 선장이다. 눈물을 흘리는 마음으로 쓰자면, 안산 단원고 학생들의 캡틴은 내 인생의 캡틴들과 다른 이였다. 참호에서 제일 먼저 도망쳤고, 내가 몰았다면 사고가 없었을 거라며 책임을 변명했다. 울다 지친 국민은 퇴선명령을 내리지 않은 캡틴이 술에 취한 상태였는지, 배를 버린 뒤 5만원권을 말리던 캡틴이 도박을 하고 있었는지를 궁금해한다.

많은 이들은 세월호가 한국사회의 단면이라고 자조한다. 그 비관에 이유가 있다. 서울은 안전하다며 정작 남쪽에선 한강다리를 끊었던 캡틴이 참사 이후 회자됐다. 먼 옛날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우리는 영업정지를 앞둔 저축은행의 금고에서 자기 돈부터 꺼낸 캡틴과, 직원은 구조조정하면서 자신의 연봉은 올리는 캡틴들을 잘 안다. 수하직원 개인의 일탈이라며 부정선거 논란에서 빠져나오는 캡틴과, 어리석은 국민이 책임을 따진다고 힐난한 캡틴들도 봐 왔다. 지금, 얼마나 많은 선장들이 도처의 침몰하는 배에서 가장 먼저 몸을 빼내고 있는가. 오 캡틴 마이 캡틴, 그 배의 미래는 어떠하던가.

이경원 경제부 기자 neosar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