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달빛기행] 달이 찼다 & 宮, 그림이 되었다

입력 2014-04-19 02:11


휘영청 보름달이 두둥실 떠올랐다. 도심 한가운데 위치한 고궁에서 바라보는 달빛은 더욱 밝고 아름다웠다. 보름을 맞은 지난 14일 저녁 7시 서울 창덕궁 돈화문 앞. 달빛기행에 참가하려는 관람객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올해로 5년째를 맞이한 창덕궁 달빛기행의 첫 내국인 행사였다. 앞서 12일과 13일 저녁에는 외국인 대상 달빛기행이 진행됐다.

2010년부터 시작된 창덕궁 달빛기행은 해마다 폭발적인 인기로 입장권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문화유산을 활용한 관광 마케팅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다. 지난해까지 1만610명이 참가했고, 인터넷에서 입장권을 판매할 때마다 표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의 항의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지난달 18일 실시한 올 상반기(4∼6월) 입장권 판매 역시 2분 만에 매진됐다. 달빛이 문화상품이 된 것이다.

하루 입장객이 100명이었으나 올해는 해가 일찍 지는 4·10·11월에 2부제로 운영해 하루에 180명까지 받는다. 외국인까지 더하면 올 1년 동안 모두 37회에 걸쳐 3520명이 창덕궁 달빛을 즐길 수 있다. 창덕궁 달빛기행의 인기 비결은 무엇일까. 야심한 시간 구중궁궐에서 임금이 된 것처럼 달빛을 받으며 후원을 거닐고 전통공연까지 관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돈화문에 모여 저녁 7시30분 출발해 진선문∼인정전∼낙선재∼부용지∼불로문∼연경당∼후원 숲길을 거쳐 돈화문에서 해산하는 코스를 돌아봤다. 청사초롱을 받아들고 해설사의 안내로 걷다 처음 마주하게 된 것은 금천교(錦川橋)였다. 궁궐 안과 밖을 구분하는 다리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조금 더 가다 인정문을 지나니 웅장한 조명의 인정전(仁政殿)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해 개방된 인정전 내부는 밤에 더욱 화려한 자태를 뽐냈다. 내부에는 1908년 설치된 샹들리에와 가구, 커튼 등이 설치돼 있어 구한말 격동기에 고궁까지 스며든 서양문물의 유입을 엿보게 했다. 인정전을 나와 들르는 곳은 낙선재(樂善齋·보물 제1764호)다. 조선시대 헌종 13년(1847)에 건립된 건물로 국상을 당한 왕후와 후궁들이 거주하던 곳이다.

낙선재 내부는 창살무늬가 달빛과 함께 은은한 조명을 받아 고풍스런 모습을 자랑했다. 괴상한 모양의 괴석을 구경하면서 뒤뜰을 지나 상량정(上凉亭) 앞마당에 오르니 보름달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왔다. 창덕궁 가운데서도 달을 구경하기 가장 좋은 장소다. 궁궐 너머 종로의 즐비한 빌딩 야경과 남산 서울타워의 조명이 시야에 들어와 시공간을 초월한 달빛여행으로 안내했다.

해설사가 김초혜 시인의 ‘만월’을 읊었다. “달밤이면/ 살아온 날들이/ 다 그립다/ 만리가/ 그대와 나 사이에 있어도/ 한마음으로/ 달은 뜬다/ 오늘밤은/ 잊으며/ 잊혀지며/ 사는 일이/ 달빛에/ 한 생각으로 섞인다.” 시를 듣는 동안 가슴속에도 그리움의 보름달이 하나씩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만월문(滿月門)을 지나 후원에 접어드니 또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언덕 숲길을 넘어가니 거문고 소리가 교교한 달빛에 청아하게 들려왔다. 암행어사 박문수가 과거를 치렀던 영화당(暎花堂) 정자에서 들려오는 연주소리다. 거문고 소리를 들으며 후원의 연못인 부용지(芙蓉池)와 왕실 직속 서고인 규장각(奎章閣)을 보고 있노라면 시 한 수 저절로 나올 법하다. 우아한 건물이 연못에 어른거리는 풍경은 달빛기행의 하이라이트다.

문을 통과해 늙지 않는다는 불로문(不老門)을 지나 연경당(演慶堂)으로 향했다. 효명세자가 아버지 정조를 위해 사대부 집을 본떠 만든 곳이다. 1908년 순종이 이토 히로부미 초대 조선통감을 접견하고 연회를 베풀었던 장소이기도 하다. 연경당 앞마당에선 다과를 즐기며 전통공연을 감상할 수 있다. 구슬프면서도 구성진 가락이 마음을 적시게 했다.

궁중무용인 춘앵무와 피리 연주에 이어 판소리 ‘춘향가’ 중 ‘사랑가’ 대목에서는 관람객들이 “얼씨구, 잘한다”라고 추임새를 넣기도 했다. 20분 정도의 공연이 끝나고 청사초롱 불빛을 비추며 후원 숲길을 찬찬히 걷는 시간이다. 2시간가량의 달빛기행에 대한 소감을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새 돈화문에 다다랐다. 보름달이 머리 위 중천으로 슬며시 자리를 옮겨 따라왔다.

도시생활에 찌든 가운데 이만한 문화적 호사가 또 있을까. 이날 72번째 생일을 맞아 아내와 함께 달빛기행에 참가한 김영식(경기도 고양)씨는 “딸이 인터넷 예매를 해줘서 왔는데, 이렇게 아름답고 행복한 고궁 야경 산책은 난생 처음”이라며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참가자들 대부분이 가족이거나 연인이었다.

문화관광 상품으로 각광받고 있는 창덕궁 달빛기행의 하반기(9∼11월) 티켓은 8월 초 인터파크(http://ticket.interpark.com)를 통해 예매할 수 있다. 입장료는 1인당 3만원이고 한 사람이 2장씩 살 수 있다. 인터넷 활용이 어려운 노년층을 위해 매회 10장씩 전화예매(1544-1555)도 받는다. 창덕궁 외에도 경복궁은 30일부터 5월 12일까지, 창경궁은 29일부터 5월 11일까지 야간 개방을 실시한다.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