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달장애 안준현 작가와 어머니 이경애 집사… 숨었던 아이 하나님이 맡긴 선물이었습니다

입력 2014-04-19 02:55


새는 지진이 나기 전 이상행동을 보인다. 민감하기 때문이다. 이 ‘새’처럼 예민한 아이들이 있다. 집 안의 작은 그늘에도 추위를 느낀다. 어둠이 몰아닥치면 공포에 질릴 것이다. 이 아이도 그랬다. 아버지가 어둠에 쫓겨 사라진 뒤, 벽 앞에 몸을 붙이고 까치발을 세웠다. 아들은 이날 이후 말을 잃었다. 네 살이었다. 학교에 갔지만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다. 어머니는 체념했다.

흩어져 살던 가족이 한 집에 모인 어느 날, 아들은 시를 썼다. 가족들은 그가 글을 아는지도 몰랐다. 4B 연필로는 그림도 그려냈다. 2001년 시인으로 등단했다. 22일까지 서울 종로구 경인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여는 안준현(39) 작가의 시와 그림은 새처럼 순수하다. 어머니 이경애(64·삼애교회) 집사는 “처음엔 아들이 ‘하나님이 맡긴 선물’인 걸 몰랐다. 그게 지금도 미안하다”고 했다.

열 살 때까지 점·선·동그라미만

15일 오후 전시 준비가 한창인 경인미술관을 찾았다. 검정색 야구 모자를 쓴 우람한 청년이 입구에 앉아 있었다. “축하드린다”고 인사하자 싱글벙글 웃었다. 이 집사는 “전시하느라 들떴던 모양이에요. 늦잠 자던 녀석이 아침 6시부터 일어나 ‘빵 구워먹자’며 절 깨웠어요”라고 전했다. 이 집사도 밝은 얼굴이었다.

“아들이 어릴 땐 영재인 줄 알았어요. 20개월 무렵 ‘리빙바이블’ 12권을 새벽 1∼2시까지 혼자 넘기다 잠드는 거예요. 나중엔 성경이 너덜너덜해졌어요. 그림과 글씨에 매료됐던 모양이에요.”

안 작가는 1975년 어머니와 당시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간사였던 안재웅(74) 박사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결혼 전 김치묵 기독교청년회(YMCA) 총무 비서로 일했다. 아버지는 79년 YWCA 위장결혼 사건 등 기독교계 인사들이 관여한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 어린 시절 정보기관 요원들이 수시로 집에 들이닥쳤다.

“준현이는 어릴 때 유난히 고함 소리를 무서워했어요. 남편이 그런 일을 하니까 수사관들이 저희 집 문을 쾅쾅 두드렸죠. ‘안재웅 어딨어?’ 소리 지르면서. 구둣발로 들어와 살림살이를 뒤집었어요. 그때마다 준현이는 온몸이 시뻘개져서 땀으로 젖곤 했어요.”

아버지가 80년 KSCF 창립일 사건으로 한밤중에 끌려갔다. 어린 아들은 어둠 속에서 그 장면을 목격했다.

“준현이가 벽 앞에 붙어 서서 두 팔과 다리를 꼬고 계속 서 있는 거예요. 계속 끌어내려도 계속 그 자세로 서 있었죠. (한숨) 그때 얼마나 세게 손을 맞잡고 비틀고 문질렀는지 지금도 약손가락과 새끼손가락이 휘어져 있어요.”

그날 이후 아이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집안 분위기는 늘 어두웠다. 아들은 심한 정서 불안 증세를 보였다.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아들은 공부를 하지도 친구와 어울리지도 않았다.

“아들은 1학년 때 공책에 매일 점만 찍었고 2학년 때는 선만 그렸어요. 3학년 때는 동그라미를 그렸죠. 친구들은 준현이를 바보라고 놀려댔죠. 결국 학교 가는 걸 포기했어요.”

아들은 두 살 터울로 태어난 동생 문현(37)과 친구처럼 지냈다.

“같은 환경인데도 차남은 괜찮은데 왜 장남만 발달장애를 겪었냐고 묻곤 해요. 준현이는 보통 사람보다 훨씬 예민했죠. 그래서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아요.”

유명 교육학박사 ‘포토그래픽 메모리’ 발견

87년 가족은 비로소 한 집에 살게 됐다. 부친이 미 하버드대 신학대학원에 유학 기회를 얻게 됐기 때문이다. 70년대 부친은 수사기관의 눈을 피해 도망 다녔고 교도소를 오갔다. 80년대 아버지는 세계학생기독교연맹(WSCF)와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 간사로 일하느라 외국에 있었다.

“준현이는 발달장애 3급 진단을 받았죠. 제대로 말도 못하고 행동도 정돈되지 않았어요. 전 어딜 가나 주눅 들었어요. 다른 사람들이 아들을 어떻게 볼까, 나를 어떻게 볼까 눈치가 보였거든요. 남편도 ‘남한테 폐가 된다’며 아이 데리고 다니는 걸 말려서 많이 다퉜어요.”

어머니는 아들을 거의 24시간 돌봐야 했다.

“지금 돌아보면 제가 준현이 덕분에 많이 수양(修養)한 것 같아요. 그 전에 전 제 잘난 멋에 살았어요. 남들을 송곳처럼 비판했어요. 그런데 아들 키우면서 사람 됐죠.(웃음) 굉장히 겸손해졌어요.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보고 배려할 수 있게 됐죠.”

아들을 위해 말투도 바꿨다.

“예전 제 말투는 하이톤에 목소리도 컸어요. 이 말투가 준현이를 더 불안하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탤런트 김혜자씨 말투를 따라했어요. 그 말씨가 낮고 부드럽잖아요. 거울 보면서 계속 연습했어요.”

88년 1월 아들이 갑자기 노트를 들고 나왔다. 어머니 아버지 동생 앞에 내밀었다. 거기에는 시가 적혀 있었다.

“저희 가족이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저는 준현이가 한글을 아는지도 몰랐어요. 초등학교 다닐 때 글을 뗐던 거죠.”

아들은 이날 밤 가족 앞에서 13편의 시를 ‘발표’했다. ‘나무야 나무야’라는 시에는 ‘그렇게 서 있으니 다리가 아프지 않니/한 자리에 서 있으니 답답하지 않니’라는 내용이 있었다. ‘지렁이’라는 시에는 ‘땅 속에만 있으니 힘들지? 밝은 세상으로 나와라’는 얘기가 있었다. 자기 자신을 향한 목소리였다. 그 시들은 가족에게, 세상에게 ‘나는 바보가 아니다. 당신들이 나를 몰랐다’는 웅변이었다.

아들은 미국 주 교육청의 도움으로 크리스틴 크리스 박사로부터 무료로 개인교습을 받게 됐다. 미 매사추세츠주립대 교수였던 크리스는 영재교육 전문가이자 교육학 박사였다.

“박사님이 준현이한테 포토그래픽 메모리(Photographic Memory)가 있다는 걸 발견하셨어요. 한 번 본 것을 사진 찍은 것처럼 정확하게 기억하는 능력이죠. 이때 고교 과정에 해당하는 걸 배웠어요.”

크리스 박사는 약 1년 6개월 동안 주 1∼2회 영어 수학 생물 지리를 가르쳤다. 10분가량 수업을 한 뒤 스스로 과제물을 하도록 했다. 아들은 크리스 박사와 영어로 대화하고 수업했다.

월간 시 전문지 신인상, 미국 전시 준비 중

아들은 일기를 쓰기 시작했고 그림을 그렸다. 크리스 박사의 초상을 그려 선물로 주기도 했다.

“일기를 시처럼 쓰더라고요. 예를 들면 ‘공이 공중으로 날아갔다. 빛을 만났다. 쨍 빛났다’고 써요. 자기 마음을 알아주는 크리스 박사를 만나면서 마음이 열렸던 것 같아요. 저희 가족은 화목했고요.”

89년에는 시와 그림을 모아 보스턴에서 시화전을 열었다. 누군가 그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읽어주자 그도 자신의 마음을 쓰고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포토그래픽 메모리를 사용해 글을 쓰고 시를 쓴다. 스캐너가 이미지를 스캔하듯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또는 반대 방향으로 이미지를 채워나간다. 지우개를 사용하는 법도 없다. 머리 속에 있는 완성된 이미지를 재현하기 때문이다.

90년 아버지가 CCA에서 일하게 되면서 가족들은 홍콩으로 이주했고 95년 시집 ‘노란 풍선’(95)을 냈다. 시인 김응교는 안 작가의 시에 대해 “햇배추 속잎마냥 희디희게 솟는 신선한 감수성의 시가 있다”며 “훈련받지 않은 야생의 감수성”이라고 평했다. 그는 2001년 월간 시 전문지 ‘심상’ 신인상을 받고 박동규 서울대 교수의 추천으로 등단했다.

“지난해 저희 가족이 다 같이 유럽 여행을 갔어요. 동생 문현이가 2000년부터 미국에서 공부하고 일하느라 떨어져 있었거든요. 이때 준현이가 너무 기분이 좋아져서 유럽에서 하룻밤 사이에 그림 19점을 완성했어요. 10여년 작품을 안 하다 동생을 만나 기뻤나 봐요.”

2011년 안 작가는 서울 중구 브레송갤러리에서 정식 개인전을 가졌다. 이때 미국 화단에서 20여 년 동안 활동한 화가 소니아 한을 만났다. 미 캘리포니아주 예술상 심사위원을 지낸 한 작가는 “안 작가의 작품은 화산같이 폭발적이면서도 표현이 아주 섬세하다. 철학도 담겨 있다. 성경을 소재로 한 작품도 있다. 예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보고 미 갤러리 전시를 추진 중”이라고 전했다.

한 작가를 비롯해 안 작가를 후원하는 단체 ‘준의 벗님들’이 이번 전시를 준비했다. 한 작가는 “준현은 외부에 있는 사람들의 감정, 행복이나 슬픔에서 작품을 시작하는 것 같다. 환경에 민감하다”고 평가했다. 안 작가는 보통 사람보다 더 민감하기 때문에 말을 멈췄고, 더 민감하기 때문에 순수하고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쓴다.

어머니 이 집사는 “예전에 아들에게 화내고 상처 준 게 미안해질 때가 있어요. 준현이 귀에 대고 ‘미안하다’고 하면 아들이 좋아하면서 ‘깔깔깔’ 웃어요. 하나님은 감당할 수 있는 사람에게 특별한 아들을 주시는 것 같아요. 이젠 준현이가 하나님이 제게 맡긴 ‘위대한 선물’이란 걸 알겠어요. 오늘이 너무 감사해요”라고 했다. 어쩌면 모든 자녀가 우리에게 선물일지도 모른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