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전정희] 풍요의 시대라지만

입력 2014-04-12 03:51


‘아이(children)’ ‘교회(church)’ ‘부엌(kitchen)’. 1950년대 미국을 규정하는 세 가지 키워드다. 불황과 전쟁이라는 어두운 터널을 뚫고 나온 미국은 물질적 풍요로 넘쳤다. 저 극동 한반도에서 수백만이 죽어가는 한국전쟁이 한창이었지만 태평양 건너 미국은 천국과도 같았다.

미국인은 주택구입과 쇼핑에 날 새는 줄 몰랐다. 2t짜리 자동차, 복층 형식의 난평면 주택(1층과 2층 사이에 중간 2층이 있는 구조), 분홍빛 정원을 갖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다. 이 시대의 특징을 사회학자들은 이렇게 정리했다. ‘모든 것은 아이들을 위해.’

그 시절 부모는 자신들이 이룬 풍요를 자식에게 쏟았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았다. 행복의 원천은 아이였고 다음이 교회, 부엌이었다. 소비 행태도 당연히 아이 중심으로 이뤄졌다. 한 목수가 싱크대 만드는 것을 접고 아이들 장난감 레고를 만든 것도 이 시대다.

50년대 미국 베스트셀러는 ‘현대어역 성경’ ‘긍정적인 사고의 힘’ 등이었고, 성직자가 출연한 TV프로그램이 인기였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 200만명의 청중을 모아놓고 복음을 전했다.

그 ‘극동의 한국’이 50년대 미국과 같은 풍요를 맞고 있다. 50년대 1인당 국민소득 100달러에 불과하던 최빈국 국민이 2만4000달러라는 기적을 일궈냈다. 50년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담배꽁초 든 음식찌꺼기를 헹궈 ‘꿀꿀이죽’으로 만들어 먹던 우리였다. 이 꿀꿀이죽은 80년 이후 생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전쟁과 불황을 겪은 우리는 지금 ‘아이’ ‘교회’ ‘부엌’을 내세울 수 있을까. 회의적이 아닐 수 없다. 몇 달 새 울산과 경북 칠곡에서 발생한 아동학대 사건은 끔찍하다. 자식 둔 부모 손발이 떨리고 심장이 멎는 것 같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시편 127:3)이라 했으나 위탁 받은 부모가 자식을 때려죽이는 비참한 현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친모든, 계모든 그저 위탁 받은 어머니일 뿐인데 말이다.

지난 10일엔 온라인에 ‘쓰레기 더미 4남매’ 키워드가 상위에 올랐다. 인천 계양경찰서가 신고를 받고 한 가정에 출동해 부모의 무관심 속에 수년간 쓰레기 더미와 오물 속에서 살아온 4남매를 발견, 아동학대피해자 보호센터 등에 넘기는 긴급조치를 취했다. 일곱 살 막내딸은 만성 변비로 인한 복수 팽창, 열세 살 둘째 아들은 지적 장애가 의심됐다고 한다. 부모의 자녀 방치였다.

국가는 이런 사건을 복지 문제로 접근한다. 사회 안전망과 복지 사각지대 차원에서 시스템을 갖추려 할 것이다. 국가의 당연한 조처다. 반면 국민은 가난한 이웃의 사고쯤으로 여기고 정부에 그 책임을 물으려 할 뿐 자신들의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한다. 내 아이에게 레고와 바비 인형을 사주었으니 내 아이는 행복할 것이고, 따라서 나는 훌륭한 부모일 것이라고 착각한다.

이런 ‘현대 우화’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타고 퍼지고 있다. 왕따당하는 자녀가 부모에게 “내 친구가 왕따당하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할까요”하고 묻는다. 부모의 답은 “그런 아이와 친하게 지내지 마”였다. 이튿날 그 자녀는 자살했다는 내용이다. 너무 충격적이다.

우리 아이들은 미국의 50년대처럼 풍요롭다. 그러나 그 부모에겐 교회도, 부엌도 없다. ‘마른 떡 한 조각만 가지고도 화목’하기보다 자식 팽개치고 더 벌기 위해 악다구니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서인지 모르겠다. 대체 뭐를 잃고 산 걸까.

전정희 디지털뉴스센터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