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임순 (3) ‘출생의 비밀’ 큰아버지·어머니가 친부모라니…
입력 2014-03-31 02:09
식음을 전폐하고 드러누워 있던 내게 큰댁 이모는 놀라운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임순아, 네 엄마(작은어머니)는 스물일곱 살에 남편을 잃었단다. 자식도 하나 없는 상황이었지. 집안의 어른들은 젊은 나이에 혼자가 된 네 엄마가 너무나도 가여웠단다. 그래서 네가 아직 갓난아기였을 때 너와 네 오빠를 네 엄마에게 양자로 들였단다. 그리고 한집에 살면서 너희 가족을 보살펴 왔던 것이다.”
나를 낳아주신 큰아버지에게는 형제가 넷이었다. 일제의 식민 지배가 시작되면서 작은아버지를 비롯한 친가 식구들이 만주로 피난을 갔다고 한다. 만주에서 자리를 잡은 뒤 어머니(작은어머니)를 모셔올 요량이었다. 하지만 타향에서 작은아버지는 세상을 먼저 떠났고, 어머니만 덩그러니 시댁에 남겨지게 된 것이다.
유교적 전통이 강한 집안이라 작은아버지의 제사를 모실 사람이 필요하기도 했고, 또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어머니가 불쌍해 큰아버지는 자녀 7남매 중 둘째오빠와 나를 동생 집에 양자로 들였던 것이다. 아무런 기억이 없는 것을 보니 젖을 떼자마자 일어난 일이었던 것 같다. 나는 나중에 ‘초상집에 흰 가마를 타고 들어갈 딸’이 되기 위해 양녀가 된 셈이다.
큰댁 이모의 충격적인 이야기에 나는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곧 친자식도 아닌 우리 남매를 크나큰 사랑으로 키워주셨던 어머니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귀한 일인지 깨닫게 됐다. 그리고 평생 작은어머니를 친어머니로 생각하고 모시기로 다짐했다. 이후 나는 평생 작은어머니를 어머니로, 친부모님은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로 불렀다.
김천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이화여자대학교 가사과에 입학, 1949년 학사모를 썼다. 이후 개성에 있는 고려여자사업관에서 교편을 잡았다. 고려여자사업관은 가정이나 경제적 형편 때문에 중학교에 갈 수 없는 여자 아이들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10대 후반 여자 아이들이 다녔다. 나는 이곳에서 일반 중학교 교과목을 비롯해 수공예와 가사 과목을 가르쳤다.
이듬해인 1950년 4월 교회에서 만난 송승규씨와 결혼했다. 남편 역시 교사로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결혼 두 달 만인 그해 6월 중순, 남편과 나는 생부인 큰아버지의 회갑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고향 상주에 내려갔다. 잔치를 잘 마친 뒤 남편은 수업 때문에 먼저 서울로 올라갔다. 당시 임신 초기였던 나는 몸이 불편해 친정에 며칠 더 머무르기로 했다. 하지만 그것이 남편과의 마지막이 될 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남편이 서울로 올라가고 난 뒤 바로 그 주일에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그리고 남편과의 인연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전쟁은 참혹했다. 포탄과 총알이 문자 그대로 비 오듯 쏟아졌다. 마을이 없어졌고, 도로를 비롯한 모든 기반시설이 무너져 내렸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큰 상처를 입었다. 이웃들이 옷가지와 밥그릇 몇 개만 짊어지고 피난을 떠나기 시작했다. 피난길에서 소식이 끊어진 사람도 수없이 많았다. 행여 남편의 소식이 들려오지 않을까 기다리고 기다렸지만 결국 산달이 거의 차서 친정 식구들과 함께 피난길에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피난길에 오른 1951년 봄, 나는 사랑스러운 딸 우정이를 낳았다. 열악한 피난길 환경에서도 입을 오물거리며 젖을 빠는 아기 덕분에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우정이가 혼자 앉을 수 있게 된 무렵 시어머니께서 거제도로 피난 와 계신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딸아이를 업고 난생처음 거제도 땅을 밟았다.
정리=최승욱 기자 apples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