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de&deep] ‘사채의 덫’ 여전… 등록업체도 꼭꼭 숨어 대포폰으로 영업
입력 2014-03-28 03:17
대부업체 대해부
전화가 시도 때도 없이 걸려와 번호를 조회해 보니 중국인의 것이었다. 원금을 삼키고도 남을 이자를 채근하던 대부업자는 마지막 통화에서 “아무래도 집으로 찾아가야 되겠구먼”이라는 말을 남겼다. 피해자가 대부업체의 주소도 몰라 전전긍긍하던 차에 이 말이 단서가 됐다. 잠복근무한 경찰이 검거해 보니 갓 서른을 넘긴 청년이었다. 27세 때부터 ‘돈 놀이’를 했다고 했다. 경찰 관계자는 “겉보기엔 순진무구해 보였다”고 말했다.
◇이번 한 번만=이는 무심코 불법 대부업체(사채)의 덫에 빠졌던 중년 여성 박모씨의 사례다. 박씨는 불법 대부업 피해자들을 상대로 무료 법률서비스를 자문하는 민주당 최재천 의원실의 송태경 보좌관의 도움으로 덫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민생연대 사무처장이었던 그는 최 의원실에서 ‘민생고(民生苦) 희망찾기’ 프로젝트만을 담당하는 특별 보좌관이 됐다. 박씨처럼 “이번 한 번만 빌리자” 했던 이들이 매일 적어도 5명씩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835호의 문을 두드린다. 송 보좌관이 “법정 최고이자율을 초과해 갚은 돈은 돌려받을 수 있다”고 안내하면, 악마 같은 추심에 시달리던 이들은 쉽게 믿으려 하지 않는다.
박씨의 부주의는 없었을까. 금융당국과 각 지자체, 대부금융협회 등의 인터넷 홈페이지에만 가도 대부업체의 등록 여부는 손쉽게 조회된다. 송 보좌관은 27일 “금융 관련 지식을 잘 모르고 돈이 급한 취약 계층은 여전히 불법 대부업에 빠져들고 있다”고 말했다. 신용등급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이야기에 혹해 오토바이가 흘리고 간 ‘최저금리 당일대출’ 전단을 주워 드는 이들이 아직도 많다. 담당 직통 대표번호는 중국산 대포폰이며, 개인정보 유통 암시장과 긴밀할 것이 뻔한 이들의 명함이다. 불법 대부업체들이 복리의 마술을 부려 연 1000% 이자를 물린다는 것은 이제 상투적인 이야기다. 매출이 발생하지 않는 명절이나 여름휴가 기간에도 일수 입금을 해야 하기 때문에, 또다시 다른 명함을 주워 드는 이들도 많다.
그러다 보니 대부업계 은어로 ‘기리까이(미납 상태에서 돈을 더 빌려 기존 대출을 청산하는 것)’에 걸려들고, 법적 대응마저 불투명해지는 사례가 생긴다. 송 보좌관이 2011년 불법 대부업으로 판단해 형사고소했던 한 사건은 서울 중부경찰서가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지만, 아직도 결론이 나지 못했다. 송 보좌관은 “워낙 많은 대출 건이 얽힌 탓에 과연 어느 부분이 법정 최고이자율 초과에 해당하는지 입증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금융당국의 가이드라인을 비웃듯 불법 채권추심은 여전하다. ‘1일 3회’의 추심횟수 기준이 지켜지지 않는 것은 물론 폭언·폭행도 잦다. 꼭 험상궂은 지하세계 사람들만의 이야기도 아니라고 한다. 송 보좌관에게 불법 채권추심을 호소한 한 피해자는 24세 청년에게 협박을 당하고 있었다.
◇“행방불명 업체 찾아요”=서울의 구청들 대다수는 이달 들어 ‘행방불명 대부업체 찾기’에 나선 상태다. 전국에서 등록 대부업체가 가장 많은 강남구는 다음 달 14일까지 ㈜론아이비대부 등 17개 대부·중개업체의 소재확인 공고를 내걸었다. 실태조사 보고서를 제출하지 않았고, 대표자가 전화를 받지 않고, 신고된 주소로 찾아가면 빈집뿐인 유령 대부업자들에게 귀환 명령을 내린 것이다. 한 달간의 공고에도 통지가 없으면 대부업 등의 등록 및 금융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대부업법)에 따라 등록이 취소되고, 향후 5년간 등록이 제한된다.
지난해부터 서울시는 박원순 시장의 주도 하에 미등록업체, 등록 뒤 영업실적이 없는 업체, 소재불명 대부업체 솎아내기에 주력하고 있다. 송 보좌관은 “소재불명 대부업체들은 대개 일수업자들”이라고 진단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법정 최고이자율 인하와 단속 강화 등에 따라 대부업체가 전반적으로 줄고 있지만, 자신들이 아쉬울 때는 등록을 하다가도 폐업 신고를 하지 않는 업체들의 특성은 변함이 없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그나마 소재불명 대부업체 공고는 극히 일부만을 대상으로 한 단속이다. 송 보좌관은 “미등록 대부업체 수는 등록 대부업체의 2.5배에 달하며, 대부 잔액 기준으로는 1.5배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된다”고 전했다. 이 말대로라면 불법 대부업으로 형성된 지하경제 규모만 10조원을 훌쩍 넘어선다. 이 규모가 획기적으로 줄어들 것으로 예측되지도 않는다. 다음 달부터 개정 대부업법에 따라 현행 39%인 대부업 법정 최고금리가 34.9%로 낮아지지만, 기존에 빚을 낸 이들은 적용받지 못한다.
지하에 깊이 뿌리 내린 불법 대부업 문제는 쉽게 해결될까. 관계자들은 “금융소비자 스스로 조심하지 않으면 한계가 있다”고 토로한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금융당국은 상위 대형 대부업체 160곳 정도의 검사만을 담당하며, 제재 처분 권한이 없어 검사 결과를 해당 지자체에 통보해 준다”며 선을 그었다. 박 시장 취임 이후 관련 인력을 강화하고 업무를 자치구에 이관했지만, 서울시청의 대부업체 전문검사역은 아직 2명뿐이다. 송 보좌관은 “대부업체 100곳당 1명의 검사 인력이 필요하다 해도 턱없이 모자란 수치”라며 “진입장벽을 높이는 일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