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한장희] 김중수 덕본 이주열 청문회

입력 2014-03-28 02:31


오전 10시 넘어 시작한 인사청문회는 오후 5시도 안 돼 끝났다. 점심시간을 제외하면 검증 시간은 고작 다섯 시간 남짓. 의원들은 곧바로 전체회의를 열어 청문보고서를 채택했다. 보고서 채택이 일러야 다음날, 혹은 여야 대립으로 불발된 경우도 많았던 점을 감안하면 이례적이다. 하루라도 빨리 업무에 전념할 수 있도록 여야가 손을 잡고 배려해준 ‘역사적인’ 장면이다. 보고서에도 군더더기가 없다. “산적한 경제 과제에 대한 해결 의지와 경험을 갖췄다고 평가되고 준법성과 도덕성도 적격하다고 판단한다”고 기록했다.

지난 19일 치러진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 후보자 청문회는 좀 달랐다. ‘청문회 4종 세트’로 불리는 부동산투기, 병역, 위장전입, 자녀국적 등과 관련된 질의와 해명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 후보자의 깔끔한 신상 관리에 의원들은 “정책 청문회가 된 것은 후보자가 살아온 인생에 대한 평가”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정책 질의 역시 그의 내공만 확인시켜 줬다. 통화정책 등 민감한 사안에 대해선 “아직 총재가 아니라서…”라며 말을 아꼈지만 조직운영과 한은의 역할에 대해선 소신을 뚜렷이 밝혔다. 과거 발언과 기고 중 논란이 된 대목을 따지면 “그 부분은 제 실수”라며 ‘쿨’하게 인정했고, 의원들의 뜬금없는 민원성 질의도 “취지를 충분히 이해한다”며 맘 상하지 않게 받아넘겼다. 어떤 질문에도 당황하지 않고 신중하게, 때론 단호하게 답변하는 모습을 보니 개그콘서트 ‘깐죽거리 잔혹사’ 코너의 유행어가 떠올랐다. “당황하지 않고 겸손하게 받아넘기면서 팍!∼ 끝.”

며칠 지나 곰곰이 생각해봤다. 칭찬 일색이었던 청문회가 과연 이주열 개인에 대한 평가에만 기인한 것일까. 결론은 처음 생각과 달랐다. ‘기저효과’가 확실히 작용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비교대상에 따라 결과 값이 실제보다 더 부풀려져 나타나는 기저효과, 즉 김중수 현 총재와의 비교가 그를 더 돋보이게 했다는 얘기다. 장황한 설명과 영어를 곁들인 화려한 수사를 구사하지만 핵심 파악이 힘든 김 총재의 화법이 불편했던 이들은 절제된 발언에 후한 점수를 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청와대 경제수석 출신으로 이명박정부와의 정책공조를 강조, 중앙은행 독립성 논란이 일었던 김 총재와 달리 정통 한은맨으로 낙하산 논란에서 자유롭다는 것도 가산점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나흘 후면 한은 총재 명패가 ‘이주열’로 바뀐다. 시장에선 “소통을 위해 시장의 신뢰를 먼저 얻겠다”고 공언한 그의 행보에 거는 기대가 크다. 사안에 따라 때론 정부와 협조하되 때론 ‘아니요’라고 말하는 결단력이 필요하다는 의견부터 물가 안정, 금융 안정, 경제 성장이란 세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으려고 하는 무리수는 두지 말라는 얘기까지 다양한 조언도 쏟아진다.

그중 되새겨볼 만한 의견은 서민 입장에서 정책 우선순위를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 정부의 성장일변도 고환율정책이 ‘낙수효과’로 이어지지 않고 고물가로 서민 고통만 가중시켰다는 점을 국민들이 똑똑하게 기억하기 때문이다. 취임 후 시장과의 소통에도 실패하고, 정부에 끌려다니는 모습만 보인다면 그를 빛나게 만들었던 청문회는 오히려 짐이 될 수 있다. ‘칼날이 무딘 정책검증을 거친 총재라 무디다’는 비아냥거림도 쏟아질 것이다. 취임 이후에도 이 신임 총재가 진짜 고수의 면모를 보여주길 바란다. 아니면 엉터리 무술 고수가 어설프게 “끝!”이라고 외치다 진짜 고수에게 한 대 제대로 얻어맞는 개콘 같은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한장희 경제부 차장 jh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