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그 시절, 그들은 어떻게 부를 축적했을까

입력 2014-03-21 02:19


근대 한국의 자본가들/오미일/푸른역사

한국의 초기 자본주의 발달사를 기업 설립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1910년대 후반은 근대적 의미의 기업이 전국적으로 설립됐던 시기다. 그럼에도 연구는 활발히 이뤄지지 못했고, 무엇보다 식민지 근대화론과 내재적 발전론 논란에 밀려 구체적으로 조명 받지 못했다.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교수로, 2002년 ‘한국근대자본가연구’ 등을 내놓으며 한국 초기 자본주의 연구에 매진해온 저자는 이 시기에 특별히 주목했다. 그는 “1910년대 후반은 한말 식산흥업운동을 배경으로 대한제국의 관료와 상인, 수공업자 등 다양한 주체들이 뿌린 경제적 실천의 씨앗들이 제1차 세계대전의 전쟁 호황 속에 어떻게 싹틔웠는지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했다.

통계자료뿐 아니라 당시 자본가들의 구체적인 경제 행위와 정치·사회적인 활동을 추적하고, 이를 분석해서 유형화했다. 당시 신문 기사, 광고는 물론 일본국립공문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출자료를 발굴해 당시 자본가들의 보유 증권 내역, 자산 현황, 그들이 설립한 기업의 사업계획서 등 구체적인 자료들을 대거 동원했다.

당시 자본가들은 문벌양반가 출신의 관료에서 기업가로 전환한 경우가 많았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권력과의 밀접한 관계가 자본 축적은 물론 기업 설립에 주요 변수로 작용했다.

1917년쯤 총재산 5백∼6백만원을 기록하며 반도 유일의 부호로 불렸던 민영휘는 1880년대 관직에 진출한 이후 권력을 기반으로 전답과 금전을 수탈해 엄청난 재산을 축적했다. 이는 1907년 그가 관직에서 물러난 뒤 평안도 지역 인민들이 그를 상대로 재산 환수 소송을 제기하는 과정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났다.

민영휘뿐 아니라 갑오개혁을 계기로 환부물자 조달시장과 조세금납제도가 실시되면서 군부나 관청에 물건 조달권을 획득하기 위해 부정한 거래와 물품 상납이 횡행했다. 이렇듯 관부 물자 조달로 자본을 축적한 대표적인 예가 백남신 백인기 부자다. 이들을 비롯해 상당수 자본가들은 일정 자본을 축적한 뒤 기업 활동을 통해 이윤 창출이 여의치 않자 오히려 토지 매수와 농장 확장, 건물 임대 등 부동산 투자를 통해 자본을 축적했다.

상인층이 개항과 정변, 전쟁이라는 정치적 격변 속에서 자본 축적 기회를 포착해 기업가로 성장하는 경우도 일반적이었다. 금은 세공업자에서 화신백화점 창업주로 성공한 신태화처럼 재래업종에 종사하던 수공업자나 공업전습소 및 공업학교 출신의 기술자들이 소규모 제조업체를 경영하며 근대 기업가로 성장하는 경우도 있다.

저자는 부산의 민족자본가 안희제와 평양의 이승훈과 이덕환 등을 통해 민족기업가들의 모습도 되살려냈다. 일제의 정치적 탄압과 경영 미숙으로 폐업의 길을 걸었지만 평양자기제조주식회사는 역사적으로 주목할만하다. 이 회사는 1908년 서북 지방의 소액 주주 200여명이 모금해서 설립한 회사로 1919년 설립된 경성방직주식회사보다 10년이나 앞서 설립됐다. 이승훈 사장과 이덕환, 윤성운은 당시 평양 상업계의 대표적 인물들로 회사 설립과 경영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회사는 전래의 수공업적 요업을 벗어나 최초로 ‘대규모의 개량 요업’을 시도한 회사였다. 한말부터 1910년대까지 일본인이나 조선인 소유를 불문하고 도자기 공장 중 6만원 이상 자본금 규모의 회사가 대량 생산을 시도해 10년간 존속한 사례로 유일하게 기록됐다. 저자는 “식민지 근대 상황에서 이승훈 이덕환 안희제 등의 자본 축적 방식은 주류가 될 수 없었다”면서도 “비록 기술과 자본 부족 등으로 사업체를 오래 경영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국내 수요를 감안해 대량생산체제를 지향했고 일본인 자본에 대항하기 위해 소자본의 열세를 소액 주주 모집과 주식회사 형태를 통해 극복하려 한 점은 높이 평가할만하다”고 말한다.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