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강은교] 봄산의 낙엽이 가르쳐 주는 것들
입력 2014-03-19 02:42
운동화를 닦는다. 봄산에 갔다가 산길에서 낙엽이 수북이 덮인 곳을 잘못 밟아 넘어지고, 맞은 편 산길로 가려다 또 낙엽을 잘못 밟아 물에 빠지는 바람에 운동화가 엉망이 되었기 때문이다. 운동화 골 사이사이 박힌 진흙을 털어내고 칫솔로 문질러대고 하면서 낙엽에 대해 생각한다. ‘그래, 내가 잘못했구나. 너야말로 신성한 봄산의 자궁이구나. 온갖 싹들에게 바람과 추위를 피할 가장 따뜻한 방을 제공하는구나. 싹들은 너의 살에 가슴을 묻고 편히 잠자다가 날이 따뜻해지면 드디어 이 세상에 나오는 것을…. 제비꽃이며 흰술패랭이꽃, 금창초, 온갖 잡풀들….’ 수돗물을 틀면서 나는 생각한다. 나는 왜 그렇게 말없이 삶의 자궁이 되려 하지 않는가. 늙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은 더 두려워하면서, 혹시 잡풀이 될까봐, 잡풀 취급을 받을까봐 전전긍긍하는가. 나는 운동화를 세차게 물속에 흔들면서 생각한다.
이번 봄에는 꼭 저 돌에 이끼를 붙이고 열심히 물을 주리라. 언젠가 흙 몇 줌만 남아 있는 화분을 베란다에 던져두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베란다를 쳐다보았을 때 거기엔 못 보던 풀 하나가 싱싱히 허리를 펴고 바람에 팔을 벌리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그것은 한 뼘 정도 더 키가 커 있었다. 그 다음 날 아침엔 더욱. 색깔도 아주 짙었다. 그것은 나보다 훌륭했다. 매일 그 무엇인가 없다고 잉잉거리는 나보다…. 물, 햇빛, 공기, 몸 눕힐 자그마한 공간, 그거면 충분하지 않은가.
이번 봄에는 현관도 벽도 열심히 닦아 나의 체온으로 덥혀 주리라. 걸레도, 오래된 접시에도 나의 체온을 덥혀 주리라. 언젠가부터 나는 허리를 굽히는 일을 잘 하지 않게 되었다. 허리 핑계를 대면서 닦는 일도 씻는 일도 게으름을 피우게 되었다. 그러나 낙엽은 오늘 나를 가르친다. ‘저 방바닥도, 현관도, 걸레도 오래된 접시도 눈부시게 닦고, 씻어야 하리라, 너도 더 반짝반짝 닦아야 하리라’고.
이번 봄에는 더 열심히 꽃병을 꽃잎으로 덮으리라. 언제부턴가 나는 열심히 꽃다발을 산다. 바리의 꽃을 생각하면서. 바리는 우리 신화의 여주인공이다. 살살이 꽃으로, 피살이 꽃으로 그녀는 부모를 살리고, 신이 된다. 그 꽃은 생명의 꽃이다.
봄산에 수북이 쌓인 낙엽은 나를 가르친다. 꽃이 그냥 피는 것이냐고, 얼마나 오래, 그리고 따뜻하게, 비바람을 피하게 해주어야 생명의 꽃잎은 일어서는 것이냐고.
강은교(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