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코너-배병우] 오바마의 아시아 순방 부담

입력 2014-03-19 02:41


지난 6일 톰 도닐런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미국 워싱턴DC 브루킹스연구소 단상에 올랐다. ‘아시아 재균형 정책 평가 및 오바마 대통령의 아시아 방문 미리 보기’라는 세미나의 강연자 자격이었다. 4월 하순으로 예정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일본 한국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4개국 순방의 의미를 아시아 재균형(Asia Rebalance) 정책과 연관해 짚어보는 자리였다. 2010∼2013년 안보보좌관으로 재임한 도닐런은 오바마 행정부의 외교·안보정책 기조인 아시아 중시 혹은 아시아 재균형을 설계한 주역 중 한 명이다.

하지만 전 외교안보 브레인의 아시아에 대한 혜안을 기대하고 참석한 이들은 크게 실망했다. 모두발언 이후 화제는 러시아 및 우크라이나 사태, 시리아 내전 등으로 옮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1시간여 시간 중 3분의 2 이상이 아시아 이외의 이슈가 다뤄졌다. 질의응답 말미에는 한 질문자가 ‘이미 세미나 제목과 관계없이 주제가 전 세계로 넓어진 것 같다’면서 베네수엘라 시위 사태에 관해 질문하는 진풍경도 펼쳐졌다.

세미나에 참석한 한 한반도 연구자는 “워싱턴에서 얼마나 아시아 문제가 우선순위에서 밀리는지 단적으로 보여줬다”고 말했다. 얼마 뒤 내년 미국 국방예산 개요가 공개되면서 이런 분위기는 더욱 강해졌다. 같은 날 발표된 중국의 국방예산 증가 계획에 아시아 국가들의 불안감은 더욱 커졌을 것이다.

이런 가운데 아시아 순방에 나서는 오바마 대통령의 마음은 가볍지 않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대한 전력(戰力)과 자원 배분을 늘리지 않으면서도 아시아 우방들에 아시아 재균형 정책이 유효하다는 것을 설득해야 한다. 특히 중국에 맞서 안보 협력이 긴요한 시점에 최악으로 치닫는 한국과 일본 두 우방 관계를 다시 정상 궤도에 올리는 까다롭고도 힘든 일이 남아 있다.

미국 내 정치환경도 오바마 대통령에게 갈수록 불리해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해 ‘유약한 외교’라는 질책에 직면했고, 오바마케어(건강보험개혁법) 시행 차질로 이번 중간선거에서 상원 다수당 지위마저 공화당에 넘겨줄 위기에 처했다. 정치·외교적 ‘한 방’이 절실한 형편이라는 얘기다. 이런 맥락에서 오바마 대통령의 순방을 준비하는 미 행정부처와 백악관의 압박은 일본에 집중되고 있다.

이번 순방에서 양국 간 최우선 의제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다. 아·태 지역을 미국 경제권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가 담겼다. TPP 타결 시한을 올해 말로 다시 연기한 미국은 오바마 대통령 방문 시 일본의 농산물 등 민감 품목에 대한 무관세화를 관철해 협상의 큰 매듭을 짓는다는 계획이다.

당초 기대가 높았던 지난달 ‘싱가포르 TPP 참가국 장관회의’가 결렬되면서 미국은 더욱 조바심이 나 있다. 협상 결렬의 원인은 일본이 5개 민감 농산물에도 관세를 없애자는 미국의 요구를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후문이다.

미국에 TPP는 또 하나의 경제 협정에 그치지 않는다. 아시아 재균형 정책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오바마 행정부가 이 협정에 건 정치·경제적 ‘판돈’은 매우 크다.

일본이 막판 버티기로 TPP가 또 지연된다면 오바마 대통령이 내세운 핵심 외교정책이 말뿐이라는 것을 전 세계에 입증하는 셈이 될 것이다. 이는 이미 동북아 역사 문제에 대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시대착오적 행태로 앙금이 깊어진 미국과 일본 관계가 새로운 바닥으로 떨어질 가능성을 의미한다.

워싱턴=배병우 특파원 bwb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