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욱 교수의 백혈병 이야기] 인턴시절 백혈병 진단했다 선배들에 혼쭐… 환경 열악해 사비 들여서 연구

입력 2014-03-18 02:10


의과대학을 갓 졸업하고 명동성모병원에서 응급실 담당 인턴을 하고 있던 1985년 가을로 기억된다. 지방 대학병원에서 혈액질환 진단을 받고 급히 상경해 응급실로 내원한 환자를 처음 보았을 때, 2년전 국내 최초의 동종골수이식을 성공한 병원의 인턴으로서의 사명감 때문에 나름대로 문진과 진찰을 세밀히 하고 혈액, 심전도 및 방사선 기본 검사를 처방한 후 판독까지 모두 마치고 급성백혈병 진단을 내린 후 내원 2시간 만에 당당하게 혈액내과의 레지던트 전공의 선배에게 연락을 드렸다. 채 10분도 안 돼 혈액내과 스태프들과 1, 2, 3년차 전공의 모두가 응급실로 집결했고 순식간에 환자를 에워싼 가운데 김춘추 교수님께서 ‘이제는 살았습니다, 골수이식을 받으면 살 수 있습니다, 안심하십시오’라고 말하고는 환자를 곧바로 병실로 입원시키고는 바쁘게 사라지셨다. 스태프들이 모두 떠나고 난 후, 내심 정확한 진단에 칭찬을 들을 줄 알았던 나는 혈액내과 전공의 선배들에게 늦게 연락한 것에 대한 무서운 질타를 한참 동안 들어야만 했다. ‘앞으로는 혈액질환 환자는 아무 진찰도 하지 말고 곧바로 연락해!’ 무서운 불호령에 앞으로 혈액내과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다음 해 내과 전공의를 시작하며 의대생 시절부터 관심이 있었던 신장 질환을 더 공부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내 희망과는 달리, 당시 내과 의국장을 맡고 있던 홍대식(현재 부천순천향대학병원에서 근무) 선배의 주선으로 1년차 내과 전공의 과정을 혈액내과에서 시작하게 됐고, 내과 전공의 2년차 초반에 여의도 성모병원에서 혈액내과 병동 주치의를 마치고 다른 부속 병원으로의 파견 근무를 앞두고 있을 무렵, 하루는 김춘추 교수님께서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고 제안하셨다. 의례적으로 전공의의 근무 기간이 끝날 때 주어지는 회식으로만 생각하며 여의도의 선짓국과 삼겹살이 유명한 ‘서글렁탕’ 집에 도착했을 때에는 교수님이 혼자 앉아 계셨고 저녁 식사 도중 ‘이제 내가 대학원 지도교수가 됐으니 내 밑에서 혈액내과를 전공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셨다. 결국 이 제안은 다른 병원 근무 기간 내내 머릿속을 맴돌다가 ‘그래 기왕이면 나를 알아봐 주는 선배가 제자로 받아주시겠다고 적극적으로 제안하는 분야의 공부를 해 보자’는 결심으로 굳어 결국은 혈액내과 전문의의 길을 걷게 됐다.

이후 내과 전공의 수련과정의 거의 50% 이상을 혈액내과에서 근무하며 격리병동과 연구실에서 백혈병을 연구하며 밤을 지새우는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당시에는 백혈병 치료에 필요한 항암제와 항생제가 아주 적었고, 국가 의료보험이 없이 거의 모든 치료제를 외국에서 수입해 사용했기 때문에 환자들이 부담해야 하는 백혈병 치료비용은 천문학적인 수준이었다. 이런 열악한 의료 환경에서도 의료진들은 사비를 들여 가며 연구비를 조달했고 그나마 성공한 지 얼마 되지 않는 골수이식술을 더 많은 환자들에게 적용해 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1억원이 넘는 이식 비용은 많은 환자들로 하여금 치료를 중도에 포기하게 만들며 그동안 들인 고가의 치료비용을 병원으로부터 환불받고자 의료 소송이 끊이지를 않아 의료진들을 좌절에 빠뜨리는 일이 종종 있었다. 술자리에서 ‘나는 벌써 4성 장군이야! 그동안 의료 소송을 4번이나 당했거든!’이라며 제자들에게 자조 섞인 푸념을 자주 전하시던 교수님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김동욱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