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귀난치병 방치 언제까지] 정부도 사회도 외면… 엄청난 의료비·심리적 불안정에 피눈물
입력 2014-03-17 02:20
난치병 자녀 둔 부모들의 좌절과 가정 붕괴
“큰아이가 다리를 절기 시작했다. 그런데 병원에서도 원인을 모른단다. 두렵다. 우리 가족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아들이 쓰러졌다
김수린(가명·61)씨의 인생은 1988년 여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풍족하진 않아도 든든한 남편과 두 아들이 있어 남부러울 게 없었다. 88년 어느 날 큰아들(당시 10세)이 갑자기 “귀가 안 들린다”고 호소했다. 걸음걸이도 이상해졌다. 뒤뚱거리며 걷다 넘어지기 일쑤였다. 종합병원에서는 “원인을 모르겠으니 일단 지켜보라”고 했다.
그해 겨울, 큰아들이 쓰러졌다. 병은 무서운 속도로 진행됐다. 처음에는 청력을, 이어서 시력을 잡아먹더니 급기야 아들의 몸과 정신까지 굳게 만들었다. 큰아들은 기억력이 급격히 감퇴돼 어제 있었던 일도 기억하지 못했다. 언어장애가 찾아와 정상적인 대화도 불가능해졌다.
김씨는 온몸의 통증으로 울부짖는 큰아들을 하염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병명을 모르니 치료법도 몰랐다. 그는 “눈을 감아도 귓속에서 아이 울음소리가 울려 펴졌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큰아들은 1년반 만에 그렇게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 큰아들이 죽은 지 5년 만에 작은아들(당시 14세)도 정신질환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작은아들은 형이 세상을 떠났던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다.
김씨는 그때서야 두 아들의 병명이 ‘부신백질이영양증’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각종 신경계에 지방산이 분해되지 않고 쌓여 몸의 기능을 서서히 잃어가는 병이었다. 합병증 가짓수만도 엄청났다. 청력 상실, 실명, 언어장애, 기억력 감퇴, 치매, 자폐증, 경련, 보행장애, 혼수상태…. “대부분 3년 안에 영구적인 신체장애에 이르게 된다”는 말에 김씨는 “그럴 리 없다”며 의사의 옷깃을 붙잡고 오열했다.
로렌조 오일
유일한 희망은 ‘로렌조 오일’이었다. 이걸 먹으면 병의 진행을 늦출 수 있다고 했다. 당시 한국에서는 이 오일을 구할 방법이 없었다. 김씨는 수소문 끝에 미국에 있는 친지를 찾아 오일을 들여왔다. 한 달 2000㎖는 먹여야 했는데 500㎖ 한 병 값이 20만원에 달했다. 통장 잔고는 빠르게 바닥났다. 살던 집을 담보로 내놓고 대출을 받던 날, 묵묵히 김씨를 위로해주던 남편이 “모계유전이라 그렇다”며 처음으로 역정을 냈다.
설상가상으로 둘째아들에게 로렌조 오일 부작용이 나타났다. 로렌조 오일은 모든 부신백질이영양증 환자에게 효과가 있는 게 아니었는데 정보가 없어 몰랐던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이제 그만 아이를 보내라”고 했다. 김씨가 명절에 둘째아들을 데리고 시댁에 가려 하자 시어머니는 “남들 볼까 무섭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는 이때부터 외부와의 접촉을 완전히 차단했다. 남편과도 거의 말을 섞지 않았다. 김씨의 인생은 오로지 아이에게만 집중됐다.
그 사이 집 한 채가 날아갔고 김씨 가족은 기초생활수급자가 됐다. 병원에 한 번 다녀올 때마다 20만∼30만원 진료비가 나갔다. 100만원에 달하는 MRI를 매해 수차례 찍어야 하지만 한 차례만 보험 처리가 된다. 재산을 다 날리고 나니 그제야 정부에서는 30만원 간병비를 지원해줬다. 둘째아들의 상태를 본 보건소 관계자는 “특별히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며 돌아갔다. 무엇보다 이 병을 전담하는 의사를 찾을 수가 없었다. 환우회 비슷한 게 있었지만 정보가 없기는 그곳도 마찬가지였다.
김씨는 그렇게 20년째 둘째아들을 돌보고 있다. 올해 서른네 살이 된 아들의 신체는 거의 기능을 잃었다. 누워 있는 아이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밥을 먹이고, 더 나빠진 곳이 있는지 점검하는 게 김씨의 일상이다.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아들은 그렇게 수십 년을 묵묵히 방 한구석에 누워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죽어야만 끝나는 고통
16일 건국대 사회복지학과 이현희 박사의 논문 ‘희귀난치성 질환 자녀를 둔 어머니의 생활경험에 대한 질적 사례연구’에 따르면 가정에 희귀난치병 환자가 발생하면 그 끝은 대개 ‘가족의 붕괴’다. 김씨도 여러 차례 남편과 이혼 위기를 겪었고 치료에 거의 전 재산을 쏟아부어 생활고에 빠졌다.
특히 질병이 환자의 생활능력을 완전히 앗아가는 중증일 경우 가족은 말 그대로 ‘끝없는 고통’에 시달린다. 김씨는 “큰아들이 울부짖는 모습을 보며 차라리 빨리 세상을 떠나라고 기도했다”고 고백했다. 아이가 죽기를 바랄 정도로 난치병 환자 가족이 받는 정신적 고통은 어마어마하다.
희귀난치병 환자 가족이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은 정보의 접근이다. 두 아들이 모두 근이영양증을 앓고 있는 박지숙(가명·45)씨 역시 큰아들이 다섯 살 때 고열과 경기 증세를 보여 병원을 찾았지만 높은 간수치 외엔 별다른 원인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 상태로 1년을 보내자 병세가 급격히 악화됐다.
병에 대해 알려진 게 없으니 보험이나 정부 지원 기준도 마련돼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희귀난치병 환자의 부모는 엄청난 의료비를 비롯해 간병 문제, 심리적 불안정 등을 한꺼번에 감당해야 한다. 특히 어머니는 양육과 치료를 전담하면서 사회로부터 완전히 고립되는 경우가 많다.
비교적 발병환자가 많은 질병일 경우 환우회가 결성돼 있어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끼리 위로를 주고받을 수 있다. 그러나 전국에 많아야 10명이 채 안 되는 일부 중증 희귀난치성 질환자의 가족들은 고통을 털어놓을 사람도 없다.
정부경 박세환 기자 vick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