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태원준] 하이재킹
입력 2014-03-17 02:40
남자는 검은 레인코트에 검은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40대 중반에 키는 180㎝쯤. 손에는 007 가방을 들었다.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 공항에서 노스웨스트오리엔탈 항공의 보잉 727 여객기에 오른 건 1971년 11월 24일 오후. 객실 뒤편에 앉더니 승무원에게 버번과 소다를 부탁했다. 말투는 정중하고 차분했다.
잠시 후 이륙을 준비하던 여승무원 플로렌스 섀프너에게 그가 쪽지를 건넸다. 외로운 비즈니스맨의 수작이겠거니 하며 쪽지를 주머니에 쑤셔 넣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읽어보는 게 좋을 겁니다. 나한테 폭탄이 있어요.” 황급히 펴본 쪽지에는 ‘당신은 지금 하이재킹 당하고 있다. 내 옆자리에 와서 앉으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옆에 온 섀프너에게 가방을 살짝 열어 폭탄을 보여줬다. 실린더 8개가 두 겹으로 장착돼 있었다. 이어 요구사항을 속삭였다. “현금 20만 달러와 낙하산 4개, 이 비행기에 채워 넣을 연료를 시애틀 공항에 준비하라.” 섀프너는 기장에게 달려가 알렸고 기장은 관제탑에, 관제탑은 FBI와 항공사에 통보했다. 그리고 여객기는 이륙했다.
그가 탑승 수속을 하며 제시한 이름은 ‘댄 쿠퍼’였다. 오후 5시39분 시애틀 공항에 착륙한 여객기에 돈 가방과 낙하산이 전달되자 쿠퍼는 조종사와 승무원 1명만 남기고 모두 내리게 했다. 연료 주입이 끝난 여객기는 쿠퍼의 요구대로 다시 이륙했고 그는 승무원을 조종석에 들여보내곤 혼자 객실에 남았다.
2시간 반 만에 급유를 위해 네바다주 리노 공항에 착륙했을 때 쿠퍼는 비행기에 없었다. 객실 뒤쪽 출입문이 열린 채였다. FBI는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린 것으로 추정했다. 대대적인 수색이 벌어졌지만 어디서도 그를 찾지 못했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FBI 수사는 계속되고 있다. 미국 항공사(史)에 유일하게 미제로 남아 있는 하이재킹 사건이다.
당시로선 최첨단이었을 항공 시스템과 보안기술을 무력화한 쿠퍼의 범행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듬해 미국에서 무려 31건의 항공기 납치 사건이 발생했다. 대부분 모방범죄였다. 19건이 쿠퍼처럼 돈을 요구했고, 그중 15건은 쿠퍼와 똑같이 낙하산을 달라고 했다. 일반 대중교통과 크게 다르지 않던 비행기 탑승 절차가 대폭 까다로워진 것도 이때부터다. 미 연방항공청(FAA)은 1973년 항공사에 모든 승객과 짐을 검색토록 의무화했다.
수수께끼는 신드롬을 낳는다. 완벽하게 사라진 쿠퍼를 놓고 어떤 사회학자는 “개인이 거대한 테크놀로지와 시스템을 꺾은 사건”이라 분석했다. 그가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렸으리라 추정되는 지역에는 그를 소재로 한 관광 상품까지 등장했다.
지난 8일 239명을 태우고 사라진 말레이시아 항공 여객기도 납치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조사 당국의 발표가 맞는다면 이는 쿠퍼 사건보다 훨씬 큰 수수께끼를 안고 있다. 수많은 인공위성이 지구를 몇 ㎡ 단위로 훑어보는 시대에 육중한 보잉 777 비행기가 통째로 사라졌다. 정보기관이 사람들의 이메일까지 챙겨보는 시대에 멀쩡히 여행하던 239명의 행방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
말레이시아와 중국을 비롯해 인도 호주 등 주변국들이 일제히 수수께끼를 풀려고 달려들었다. 미국도 최첨단 해상초계기를 급파했고 우리 정부까지 초계기와 수송기를 보냈다. 해외 언론은 1주일 넘게 초미의 관심사로 다루고 있다. 만약 수수께끼를 풀지 못해 이대로 ‘제2의 쿠퍼’가 된다면…. 1차적으론 239명의 생사조차 알 수 없을 테고 뒤따를 파장 또한 만만치 않을 듯하다. 괴이한 사건이다.
태원준 사회부 차장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