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 대통령, 독일 방문] 부친은 ‘한강기적’… 딸은 ‘통일대박’ 꿈

입력 2014-03-15 04:13


1964년 12월 10일. 작은 키에 단단한 체구를 가진 한 동양인이 독일 북서부 함보른 광산을 찾았다. 그가 마이크를 잡자 한국 광부들이 모여들었다. “나라가 못 살아 여러분이 이국땅 지하에서 이런 고생을 합니다. 가슴이 너무 아픕니다.” 광부들은 흐느끼기 시작했다. 마이크를 잡은 남자도 손수건을 꺼내 연신 눈물을 닦았다. 바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그보다 며칠 앞서 박 전 대통령은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서독 총리 앞에서도 울먹였다. “우리 국민 절반이 굶고 있다”고 호소하는 박 전 대통령에게 에르하르트 총리는 손을 꼭 잡고 여러 조언을 했다. “한국은 산이 많은데, 그럼 경제발전이 어렵다. 고속도로를 깔아야 한다. 자동차를 만들려면 철이 필요하니 제철공장도 지어라. 정유공장도 필요하다. 중산층이 탄탄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중소기업을 육성해야 한다. 우리가 돕겠다. 경제고문단을 보내겠다.”

그렇게 독일은 ‘고마운 나라’였다. 이보다 3년 앞선 1961년 최우방이라던 미국보다 먼저 상업차관을 한국에 제공한 나라다. 박 전 대통령이 존 F 케네디 당시 대통령에게 차관을 요청했다 거절한 뒤였다. 그렇게 들여온 1억5000만 마르크(약 3500만 달러)와 에르하르트 총리의 조언은 우리 경제발전의 초석이 됐다. 박 전 대통령은 독일 총리의 말대로 경부고속도로 건설→포항제철 설립→석유공사 설립에 차례로 나섰다. 1970~80년대 고도성장기는 독일에서 시작됐던 셈이다.

아버지의 눈물이 배어 있는 땅, 일터조차 없어 광부·간호사까지 송출해야 했던 곳. 그런 독일 땅에 박근혜 대통령이 역사적인 발길을 내딛는다. 오는 25일 요아힘 가우크 독일 대통령 초청으로 3박4일간 국빈 방문을 하게 된 것이다. 당시 아버지 모습을 언론 사진으로 봐야 했던 12세 딸은 이제 현직 한국 대통령, 그것도 첫 여성 대통령에 올라 독일 수도 베를린을 찾는다.

박 대통령으로서는 선친(先親)에 대한 기억, 아니 더 나아가 선친이 기필코 이룩하려 했던 조국 근대화의 꿈이 고스란히 떠오를 것이다. 아버지 생전을 떠올리며, 50년 동안 발전을 거듭한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돌이켜볼 게 틀림없다.

이제 한국은 그때 그 시절의 최빈국이 아니다. 어느덧 세계 8위의 교역규모를 가진, 선진국 진입을 눈앞에 둔 국가다. 오로지 국민들의 생계만 걱정할 필요가 없어진 나라가 됐다.

그래서인지 박 대통령은 이번 방독에서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고민을 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와 똑같이 ‘자유민주주의 대 공산주의’로 갈렸던 분단국가 독일이 어떻게 통일을 이뤘으며, 이를 통해 어떤 경제성장·국민통합의 성과를 거뒀는지가 핵심이다. 지난 1월 6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꺼냈던 ‘통일대박론’ 화두가 의미심장한 것도 어쩌면 바로 이번 독일 방문 때문이 아니었을까.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서 역시 독일 첫 여성 총리인 앙겔라 메르켈과 갖는 정상회담도 의미심장하다. 베를린에서 통독 관련 독일 인사들을 잇달아 접견하고, 통독 과정과 방식 등 앞선 경험을 공유할 예정이다. 이곳에서 남북통일과 관련된 새로운 구상이나 선언을 내놓을지도 모른다.

베를린 일정을 마치면 곧바로 드레스덴으로 간다. 옛 동독지역의 경제 중심지였던 이 도시는 독일 경제의 대표주자인 ‘히든챔피언’ 강소(强小)기업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분단체제 속에서 사그라졌던 과학기술 중심 소기업들이 급성장하며 경제 전문가들 사이에선 ‘독일 통일의 경제적 효과가 가장 극적으로 나타난 도시’로 유명해진 곳이다. 앞으로 남북통일이 북한지역, 나아가 한국 전체에 가져올 ‘대박’ 효과를 미리 고찰해볼 수 있는 계기인 것이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단순히 경제협력 중심의 세일즈 외교가 아니라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일정이 바로 드레스덴 방문”이라고 했다. 주철기 외교안보수석은 14일 춘추관 브리핑을 통해 “이번 독일 국빈 방문은 유럽 최대 경제대국인 독일과 130여년에 이르는 우호협력 관계를 더욱 확대·심화하는 한편 통일기반 조성을 위해 독일의 통일과 통합 경험을 공유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만큼 박 대통령이 독일을 찾는 이유가 중첩적이라는 의미다.

신창호 기자 proco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