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의 영성] 시작도 못한 사람

입력 2014-03-15 02:23

다음 일화들에는 4세기 이집트 사막 수도사들이 자주 사용했던 유행어 하나가 있다. 얼굴에서 빛이 나서 모세를 닮았다고 소문났던 팜보가 임종할 무렵 그는 가까이에 있는 수도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몸에 밴 겸손을 표현했던 말

“나는 이 사막으로 들어와 수실을 짓고 살기 시작한 이후로 내 손으로 일해서 얻지 않은 것을 먹어 본 기억이 없습니다. 또 지금까지 한마디도 후회스러운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아직 주님을 섬기는 일을 시작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주님께 가렵니다.”

시소에스가 임종할 때 원로 수도사들이 그의 곁에 앉아 있었는데 그의 얼굴이 태양처럼 빛났다. 그는 사부 안토니와 선지자들이 자기를 맞이하기 위해 내려오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얼굴이 더 환해지면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원로들이 그에게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천사들이 나를 데리러 오고 있어서 나는 좀 더 회개하게 해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한 원로가 “당신은 회개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하자 시소에스는 “나는 아직 회개를 시작도 못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어느 날 키 작은 존이 교회 안에서 자기 뒤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슬퍼하며 탄식했다. 그것은 수도사들이 홀로 있을 때만 하는 일이었다. 나중에 이를 알고 존은 그 사람 앞에 엎드려 “사부여,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나는 아직 시작도 못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시작도 못한 사람입니다’라는 말은 사막의 유행어였다. 그 비슷한 의미로 “나는 아직도 수도사가 되지 못했습니다”라는 말도 자주 사용되었다. 그 당시 이 말을 한 사람들을 보면 수도원에 갓 입회한 초보자들이 아니라 원로들이었다. 평생 금욕적인 삶을 살며 완전의 경지에 이른 수도사들은 자신을 시작도 하지 못한 초보자로 정의했다. 겸손하신 하나님을 바르게 배운 사람들은 몸에 밴 겸손을 그렇게 표현했다. 그래서 원로 오르가 “수도사의 왕관은 겸손입니다”라고 말했나 보다.

겸손의 훈련이 있는가

어떻게 이런 경지에 도달했을까? 티토에스는 기도할 때 자주 황홀경에 빠져 천상으로 올라갔던 원로였다. 하지만 사람 앞에서는 “나는 아직도 수도사가 되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어느 수도사가 티토에스에게 “겸손에 이르는 길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티토에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겸손에 이르는 길은 자아절제, 기도, 그리고 자신을 모든 피조물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는 것입니다.”

존 카시안이 소개하는 겸손의 열 가지 증표에서는 좀 더 자세한 정의와 훈련법을 볼 수 있다. “자기의 뜻을 죽인다. 영적 지도자에게 자신의 생각과 행위를 숨기지 않고 말한다. 모든 것을 영적 지도자에게 맡기고 그의 조언을 목마르게 찾고 듣는다. 모든 일에 순종하고 꾸준히 참는다. 아무에게도 억울한 일을 행하지 않고 남에게 억울한 일을 당해도 아파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수도원 규칙과 선배들의 모범적 행위들을 본받는 것 외에 아무것도 스스로 행하지 않는다. 온갖 미천한 것에 만족하고 자신을 나쁜 일꾼처럼 부당하게 여긴다. 모든 이들 가운데 자신이 가장 못난 사람이라는 것을 입술로 드러낼 뿐만 아니라 마음속 깊이 확신한다. 혀를 억제하고 큰소리를 내지 않는다. 남의 말에 쉽게 빨리 웃지 않는다.”

사막에서는 무엇이 겸손인지 정확히 규정하고 이 정도는 되어야 겸손에 이르렀다고 인정했다. 스승들은 제자들이 자신은 다른 사람보다 못난 자요 낮은 자이며, 하나님 앞에서는 무익한 종이며 모든 사람들 중의 가장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항상 점검하도록 했다. 누구를 판단하거나 잘못을 지적하거나 또 논쟁하는 것은 극히 경계했다. 죄를 범하고 슬피 울고 있는 사람을 본 한 원로는 “오늘은 그 사람이 울고 있지만, 내일은 내가 울게 될지도 모른다. 범죄한 사람을 판단하지 말며 스스로를 그보다 더 악한 죄인으로 여기라”고 가르쳤다.

겸손하기 위한 사막의 훈련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따라 하기 힘들다. 하지만 겸손하기 위한 우리 나름대로의 훈련들이 교회에 있는가 묻고 싶다. 성도들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야 하며, 결국 자기를 기쁘게 하는 자아 중심 문화를 그대로 따르고 살도록 내버려두고 있지 않는가. 뭘 좀 했다 하면 다 된 것처럼 우쭐대는 사람들과 우리가 무엇이 다른가. 겸손이 부족해서 얼마나 많은 갈등과 다툼이 가정과 교회, 직장과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가

예수님은 첫 아담이 에덴의 선악과 나무에서 잃어버린 겸손을 십자가 나무에서 다시 찾아주셨다. 교회의 위대함은 이 주님의 겸손을 따르는 데 있다. 시작하고 한참 지났지만 여전히 자신은 아직 시작도 못했다고 생각하는 겸손한 사람들로 교회가 채워지는 날, 우리는 다시 그 위대함을 유지해 갈 것이다.

김진하 <백석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