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이흥우] 5·24 딜레마

입력 2014-03-14 01:37


“통일대박의 기초를 닦기 위해서도 5·24 조치 출구전략을 적극 모색해야 한다”

남북문제는 고차방정식을 푸는 것과 비슷하다. 풀릴 듯 풀릴 듯 하다가도 많은 변수에 하나의 오답만 대입해도 미궁에 빠지는 고차방정식처럼 남북관계가 그렇다. 한·미 키 리졸브 훈련 고비를 간신히 넘어 지난달 이산가족이 금강산에서 만났을 때 교착상태에 빠진 남북관계에 금세 돌파구가 마련될 것으로 기대됐었다. 적어도 이산가족 상봉문제만큼은 양측의 진일보한 접근이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컸다.

괜한 기대감이었다. 그 후에도 남북관계는 별 진전이 없다. 여러 원인이 있지만 남북의 우선순위가 다른 것도 큰 요인이 아닌가 싶다. 남(南)은 이산가족문제 해결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있는 반면 경제난에 시달리는 북(北)은 금강산 관광 등 당장 돈 되는 사업에만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해가 다르니 통하는 일이 드물다.

이산가족문제 해결의 가장 큰 적은 시간이다. 시간은 고령의 이산가족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조급할 수밖에 없다.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에도 그 절박함이 배어 있다. 박 대통령은 지난 4일 국무회의에서 “더 이상 이산가족이 기다릴 시간이 없다. 이산가족들이 한 번이라도 만나려면 상봉 규모를 매년 6000명 이상으로 늘려야 하는 만큼 상봉 정례화, 화상 상봉 등의 방안을 북한과 협의하라”고 말했다.

정부는 상봉 정례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적십자 접촉을 갖자고 두 차례나 제의했으나 북은 거부했다. 남측의 절박함을 역이용해 만만디 전략으로 자신의 몸값을 극대화하려는 수로 보인다. 이산상봉에 응하는 한편 그 이상의 선을 허락하지 않는 특유의 치고 빠지기로 우리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다. 특히 박 대통령의 ‘통일대박’ 발언 이후 정부가 남북관계 개선에 속도를 내면서 그러한 경향이 두드러지는 느낌이다.

박근혜정부 들어 당국간 고위급 접촉이 이루어지는 등 남북관계가 전임 이명박정부 시절에 비해 나아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아직 근본 변화를 이끌어낼 징후는 감지되지 않는다. 간헐적인 긍정적 신호에도 불구하고 남북관계는 2010년 5월 24일에 멈춰 있다. 천안함 폭침사건 이후 취해진 5·24 대북 제재조치로 개성공단을 제외한 남북 경협과 인적 교류는 4년째 전면 중단된 상태다. 이를 그대로 놔둔 채 통일대박을 논하는 건 이율배반이다. 그렇다고 해제할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한국개발연구원이 최근 보고서에서도 밝혔듯이 5·24 조치가 일정 부분 효과를 거뒀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반대로 남측이 당초 기대한 수준의 효과를 거뒀다고 보기도 어렵다. 중국이 북한의 뒤를 봐주고 있는 마당에 남측의 제재만으로는 그 효과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속은 없고 허울만 남은 5·24 조치라는 혹평이 나오는 이유다. 물론 5·24조치를 해제하기 위해서는 북의 성의 있고 책임 있는 조치들이 선행돼야 한다. 최소한 북의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은 받아내야 한다는 게 정부 입장이고 대다수 국민들 생각도 그렇다. 이 같은 필요충분조건이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 해제할 경우 북에 잘못된 시그널을 줄 수 있고, 천안함 46용사의 산화를 헛된 죽음으로 전락시킬 수 있다. 문제는 천안함 사건은 자신들 소행이 아니라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는 북한이 우리의 요구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다는 데 있다.

박 대통령이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비무장지대 평화공원 조성사업도 북의 참여를 이끌어내야 의미가 배가된다. 통일대박의 기초도 닦아야 한다. 이제 5·24 조치에 대한 출구전략을 모색할 때가 됐다. 전면 폐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완화시킬 필요성은 충분하다. 북·러시아 경협사업 나진·하산 프로젝트에 우리 기업이 우회 참여하고 관계자들이 정부 허가를 받아 북한을 방문함으로써 5·24 조치의 일각이 무너졌다고 볼 수 있다. 남은 건 명분이다. 남북이 자존심에 상처를 입지 않고 서로를 만족시킬 수 있는 명분을 만드는 시도가 절실하다. 지금 물밑에서 협상이 진행 중인지는 모르지만.

이흥우 논설위원 hw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