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헤엄치는 ‘57층 수영장’… 싱가포르 마리나베이샌즈 리조트
입력 2014-03-13 01:34
바닷가 호텔에는 대개 두 종류의 방이 있다. 바다가 보이는 방과 뭍이 보이는 방. 우리의 상식은 창문을 열었을 때 눈앞이 탁 트이는 ‘오션뷰’를 택하는 것이다. 바다와 하늘의 두 파란색이 만나는 수평선을 언제 또 보겠나. 서울의 미세먼지 속에선 절대 볼 수 없는 색깔과 마주할 기회다.
그러나 싱가포르 마리나베이샌즈 리조트에서는 이 상식을 버려야 한다. 바다를 본 지 아무리 오래됐어도 방은 무조건 ‘시티뷰’를 달라 하자. 창문을 열면 작은 호수 너머로 싱가포르 금융가의 초고층 빌딩 숲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HSBC, DBS, CITI 등 글로벌 금융사들이 돈으로 그려낸 스카이라인의 위용은 수평선을 압도한다. 도시는 바다보다 아름다울 수 있다.
지난달 17∼19일 묶었던 방은 불행히도 오션뷰였다. 적도의 바다가 주는 시원한 풍광에 감격하다 57층 야외수영장에 올라가서야 그렇게 좋아할 일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지상 200m의 ‘하늘과 가장 가까운 수영장’ 인피니티 풀 역시 바다를 등진 채 도시를 향해 놓여 있었다.
다들 수영복을 입었지만 수영하는 이는 많지 않다. 낭떠러지처럼 보이는 풀 가장자리에 턱을 괴고 도시의 풍경을 바라본다. 카메라를 조심조심 물에 갖고 들어가 사진을 찍는 배경도 빌딩이다. 허리까지 물에 담그고 섰는데 뒤로 고층빌딩 꼭대기가 앵글에 들어오는 곳, 세상에 많지 않다.
마리나베이샌즈에서 하루 일과는 이 수영장을 중심으로 짜는 게 좋다. 투숙객만 이용할 수 있고 아침 6시부터 밤 11시까지 문을 연다. 여러 식당이 있지만 아침은 수영장 옆 레스토랑 ‘더 클럽’의 야외테이블에서 드시라. 지상(地上)에선 출근 인파로 몸살을 앓고 있을 도시도 천상(天上)의 수변(水邊)에서 커피 한 잔 놓고 바라보면 고즈넉하다.
마리나베이샌즈는 복합리조트를 표방한다. 명품 브랜드들이 경쟁하는 초대형 쇼핑몰, 현지인은 10만원 가까이 입장료를 내지만 외국인은 그냥 들어가는 카지노, 제법 비중 있는 전시를 기획하는 박물관, 대형 인공폭포까지 갖춰서 조금 과장하면 영화 ‘아바타’의 판도라 행성이 연상되는 바닷가 정원…. 눈길 닿는 대로 돌아다니다 지치면 수영복에 가운 하나 걸치고 57층으로 올라가면 된다.
싱가포르는 두 계절, 무더운 여름과 덜 더운 여름이 있다. 쇼윈도에 걸려 있는 가죽점퍼는 추운 데서 온 관광객을 겨냥한 게 분명하다. 여행사에서 챙겨 가라 일러주는 카디건은 에어컨 바람이 너무 셀 때 입으란 뜻이다. 그래서 싱가포르는 밤을 보러 가는 곳이다. 적도의 태양을 네온사인이 대신하면 도시는 활력을 얻는다. 특히 요즘은 연중 가장 덜 습하고 밤이면 제법 서늘한 바람도 분다.
야자수가 늘어선 리조트 앞 호숫가를 잠시 걷다보면 선착장이 있다. 작은 유람선을 타고 호수를 가로지르며 바라보는 야경은 이 도시가 관광지라 불리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20분이 채 안 돼 배는 클라크 키(Clarke Quay)에 도착했다. 과거 화물선이 짐을 부리던 곳인데 지금은 물가를 따라 이색적인 레스토랑과 펍, 클럽과 바가 늘어선 ‘나이트 라이프’의 중심지가 됐다. 언제부턴가 싱가포르에 가면 꼭 먹어야 할 음식이 된 칠리 크랩은 ‘점보씨푸드’란 체인점을 찾아가면 된다.
요즘 한국도 다문화사회를 말하고 있지만 싱가포르는 다문화의 ‘원조’쯤 되는 나라다. 중국계, 말레이계, 인도계 등 다양한 이들이 살고 있다. 19세기 이곳을 식민지로 삼은 영국이 민족별로 거주할 동네를 지정했던 까닭에 지금도 차이나타운 아랍스트리트 리틀인디아 같은 거리가 조성돼 있다. 모두 마리나베이샌즈에서 지하철로 두세 정거장씩만 가면 된다.
‘벌금의 나라’답게 지하철에는 두리안(열대과일)을 갖고 타지 말라는 경고문까지 붙어 있었다. 냄새 때문이다. 숨 막히게 깨끗한 차이나타운역을 벗어나면 고색(古色)의 중국인 동네가 나타난다. 골목골목 식민지 시대의 2∼3층 건물에 붉은색으로 치장한 상점이 빼곡하다. 딤섬이 맛있다는 ‘얌차’, 망고빙수를 파는 ‘미향원’ 등이 유명한데 그냥 걸어 다녀도 심심할 일은 별로 없다.
지하철 부기스역에서 이슬람사원 ‘술탄 모스크’가 있는 아랍스트리트까지는 5분쯤 걸어야 한다. 하지레인이란 좁은 골목은 서너 평 가게들이 저마다 다른 색 페인트를 알록달록 차려 입고 손님을 기다린다. 이 동네도 밤에 가야 제대로 즐길 수 있다. 골목골목의 상점과 식당은 점심을 훌쩍 넘겨야 문을 연다. 돼지고기를 넣지 않은 무슬림의 할랄 음식을 먹어보자.
이렇게 돌아다니다 마리나베이샌즈로 돌아온 시간이 좀 늦었더라도 수영장엔 다시 한번 올라가 보시라. 이 리조트는 바다를 메운 간척지에 지었다. 전에는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쪽에서 비스듬히 바라봐야 했던 마리나 베이의 야경을 여기선 정면으로 볼 수 있다. 바다를 메워 도시의 야경을 훔친 리조트. 밤 11시까지 수영장 문을 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싱가포르=글·사진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