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폴리 현숙 (6) 외증조모-외조모-엄마-딸 4代의 약속 ‘기도하는 삶’

입력 2014-03-13 01:33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라는 찬양이 있다. 나는 이 찬양을 들을 때마다 어머니가 생각난다. 서울유에스에이의 숨은 중보기도자. 내가 광야에서 헤매고 있을 때 중보기도로 빛이 돼 준 나의 어머니.

어머니는 1930년 개성에서 태어나셨다. 할머니와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개성에 있는 교회를 다니셨다고 했다. 어머니도 나처럼 기도를 많이 한 어머니가 계셨다고 들었다. 어머니는 서울로 내려와 한 교회에서 집사님의 소개로 아버지를 만났다. 그때가 18세였다. 그때 약혼도 했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결혼을 안 하겠다고 해서 뛰어가 따졌다고 한다.

“왜 저와 결혼을 안 하려고 하나요? 난 할 거예요.” 아버지는 어머니의 당돌함에 “이 조그만 여자가 보통이 아니네”라고 생각하고 결국 결혼했단다. 아버지가 결혼을 안 하려던 이유는 하던 장사가 잘못돼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딸만 내리 일곱을 낳은 어머니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왜 내게 딸만 낳게 하지?”라는 생각에 하나님을 떠났다. 그러다 아들을 낳은 후 다시 신실한 신앙인으로 살아오셨다. 그렇게 생각하면 남동생에게 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아이가 안 태어났다면 나는 영원한 중보기도자를 잃을 뻔했으니.

아버지는 사업에 성공하면서 하나님과 멀어졌다. 주말마다 골프를 치러 다니셨다. 어머니는 항상 성경 가방을 들고 교회로 가셨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세상을 즐길 줄 모른다고 ‘어리석은 백성’이라고 부르셨다. 내가 어렸던 60, 70년대엔 목회자들의 생활이 넉넉지 못했다. 부유했던 어머니는 맛있고 귀한 음식은 항상 최고의 부분을 먼저 떼어서 담임 목사님께 갖다드렸다. 아버지는 기독교인이라면 무조건 믿고 속는다고 어머니를 계속 ‘어리석은 백성’이라고 부르셨다.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항상 혼자 방에서 성경 보시고,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모습이다. 왠지 나는 그때마다 마음의 평안을 느꼈다. 나도 어머니 방에 살짝 들어가 함께 예배를 드리곤 했다. 어머니 자신은 별로 못 배우셨다고 생각하고 자존감이 낮지만 기도 하나만은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박사감이시다. 전에 살던 아파트에서 어머니가 하도 기도를 크게 하셔서 옆집에서 조금만 작게 기도하라고 불평을 했다고 한다. 그런 어머니가 나는 자랑스럽다. 부유하게 사셨어도 절약하려고 택시도 안 타신 어머니는 그 돈을 절약해서 자식이나 손자들이 신학교에 가면 등록금으로 주셨다. 결국 모든 자식들을 하나님의 종으로 만들고 싶어 하셨다. 최근엔 내가 횃불트리니티신학원에 들어갔다고 하자 어머니가 기뻐하셨다.

어머니는 딸들에게 항상 용서를 비신다. 나에게는 이렇게 선교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인생이 될 줄도 모르고 태어났을 때 죽기를 바랐다고 용서해 달라고 하신다. 난 어머니를 백분 이해한다. 어쨌든 그것은 어머니의 최선이었으니까.

어느 날 강의를 하며 어머니의 고향이 개성이라고 하니 “회장님도 우리 동족이구만요”라고 한 탈북민이 말했다. 난 그 말이 너무나 좋았다. 동족. 어머니 덕택에 내가 북한 분들의 영광스러운 동족이 되었다.

폴리 목사는 어머니에게 “어머님은 담임목사이시고, 저는 부목사입니다”라고 말해서 어머니를 웃게 만든다. 폴리 목사가 어머니를 처음 만났을 때 기도제목을 여쭈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어머니의 소원은 똑같다. 그것은 기도하는 자세대로 하나님께 열납돼 돌아가시는 것이다. 내가 선교현장을 다닐 때면 목놓아 큰 소리로 나를 위해 기도하실 어머니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히 들리는 것 같다. 이제는 내가 어머니의 소원을 위해 기도할 차례인 것 같다.

정리=최영경 기자 yk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