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폴리 현숙 (1) 일곱 번째 딸의 서원기도 “선교사가 되겠습니다”
입력 2014-03-06 02:31
나는 1961년, 딸만 여섯인 가정에서 일곱째 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개성에서 할머니 손을 잡고 교회에 나가셨다니 어머니 쪽으로는 4대째, 아버지 쪽으로는 3대째 기독교 가정이다. 아들을 낳아서 대를 이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가졌던 어머니는 내리 딸만 낳으셨다. 어머니에게 나는 곧 ‘일곱 번째 실패’였다. 어머니는 내가 태어났을 때 속이 상해서 금방 낳은 나를 당신의 배에 다시 넣고 싶을 정도여서 냉기 도는 윗목에 뉘어 놓았다고 말씀하셨다. 아들을 낳지 못해 쫓겨날 위기였던 그 시절 어머니의 심정을 지금은 이해한다. 어머니는 다행히 이후 아들을 낳으셨지만, 나는 어려서부터 내 존재 자체에 대한 회의를 갖곤 했었다.
그래도 어머니와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이 있었다. 5세 무렵, 나는 고치기 힘든 병에 걸렸었다. 의사들도 포기해 어머니는 교회 부흥회마다 나를 업고 찾아가 목사님들께 안수기도를 받게 하고, 간절히 기도하셨다. 그토록 나를 살리려 애쓰셨던 어머니의 모습은 잊혀지지 않고 나를 위로해주는 사건이었다.
남동생은 우리 집안에서 왕이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부모님이 이루어주셨다. 나는 남동생을 본 딸이라고 ‘예쁜이’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여전히 남동생과는 비교할 수 없는 존재였다. 언니들과 싸우면 부모님은 감히 언니들과 싸운다고 나를 야단치셨고, 남동생과 싸우면 감히 남동생과 싸움을 한다고 야단을 치셨다. 세상은 태어나면서부터 불공평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 느꼈다.
자수성가로 성공한 사업가였던 아버지 덕에 나는 기사가 운전하는 자가용으로 중·고등학교까지 등하교하는 부유한 생활을 누렸다. 명문 대학에 들어가 부모님의 어깨에 힘을 실어 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수능시험에서 답이 분명하지 않을 때 두 개의 답에 체크해 성적이 잘 나올 수 없었다.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해 부모님께 하고 싶은 효도를 못하는 것 같아 죄송했다. 하지만 부모님께 순종해서 기쁘게 해 드리겠다고 다짐했다.
대학에 입학해 신입생 팝송 경연대회에서 인기상을 타면서 대학생 방송 프로그램인 ‘영 11’과 ‘젊음의 행진’에 출연했다. 아버지는 우리 집안에는 ‘딴따라’가 없으니 TV에 계속 출연하려면 집을 나가라고 엄포를 놓으셨다. 유럽 배낭여행을 가고 싶어서 대학 4년 동안 저축했고 무용, 스튜어디스, 패션 공부를 위한 일본 유학 등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지만 아버지는 좋은 남편을 만나서 시집가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고 모두 반대하셨다. 결국 내 인생의 목표는 결혼을 잘 해서 현모양처가 되는 것이 됐다. 그것이 나의 부르심이고 부모님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대학 다닐 때 남서울교회 대학부에서 선교사가 되겠다는 서원기도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의 활달한 성격이 한국의 전통적인 사모상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나만의 생각으로 선교사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이 분명히 실수하셨다고 가볍게 넘겨버렸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의 서원기도를 절대로 잊지 않으셨고 건축자의 버린 돌을 사용하시어 북한 분들이 다시 세워지는 데 사용하셨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행 4:11)
정리=최영경 기자 ykchoi@kmib.co.kr
◇약력: 1961년 서울 출생, 성균관대 대학원 석사, 콜로라도크리스천대 상담학 석사, 리젠트대 리더십 박사, 현 횃불트리니티신학원 MDiv 과정, ㈔서울유에스에이선교회 공동대표, 한국 순교자의 목소리(Voice of Martyrs Korea) 공동대표, 프라소 한국 설립자 겸 회장, 탈북민을 양육하는 유유선교학교와 유티학교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