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방우체국-러시아 나홋카 박광배 선교사] 도착했던 선교지, 맞이한 것은 싸늘한 바람뿐…

입력 2014-02-24 01:38


나는 시니어 선교사다. 머잖아 현장에서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해외선교사로 지원할 누군가를 위해 먼저 이국땅을 밟은 내 경험을 전하고 싶다. 만일 해외선교사를 파송하는 입장이라면 선교사가 어떤 마음으로 공항을 출발하는지 아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 선교사의 고뇌를 구체적으로 안다면 기도 후원도 수월히 될 거라는 기대에서다.

선교지로 출발

선교사라면 한 번쯤은 공항 출국장에서 남모르게 눈물을 흘렸으리라. 난 이 눈물을 선교사의 초심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삶의 여정을 주님 손에 맡긴 채 묵묵히 떠나던 순간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1991년 선교지로 떠나던 날, 당시 서울남교회 당회장인 고(故) 박원섭 목사와 성도들, 지인과 가족들이 김포공항에 모였다. 이들은 선교지로 떠나는 날 위해 손을 잡고 뜨겁게 기도했다.

밝게 웃는 모습으로 인사하고 탑승 수속장을 향해 돌아섰다. 그러자 갑자기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흐르는 게 아닌가. 우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 나는 배웅해주는 분들을 향해 다시 인사하지 못했다. 선교지에 살림집을 구하고 사역 현장이 정해진 뒤 가족을 데려오기로 했기에 나 홀로 떠나는 길이었다. 가족을 뒤로 하고 떠나는 순간이라 더 울컥했는지 모르겠다. 러시아 선교를 위해 기도해주시는 교회와 지인들, 그리고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영적군사의 얼굴은 그렇게 눈물로 범벅이 됐다.

러시아 선교사로 지원한 걸 후회해서일까. 아니면 고국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일까.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나를 복잡하게 했다. 한편 마음 한쪽으론 비장한 각오를 새겼다.

“주님! 드디어 떠납니다. 사랑하는 가족도 지인도 뒤로하고 이제 출발합니다. 나 홀로 가지 않게 하시고 함께해주십시오.”

당시에는 러시아 극동지역 직항이 한국에 없던 때다. 김포공항에서 출발해 일본 니가타 공항을 거쳐 러시아 하바롭스크행 비행기를 탔다. 가을이라 활주로 밖의 김포 들판의 벼는 누렇게 익어 고개를 숙였다. 벼들조차 나에게 선교지에서 승리하라는 것 같았다. 알알이 익은 벼를 보며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제 사역도 들판의 잘 익은 벼처럼 영적 추수가 가득하게 해주세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오리라’ 말씀했으니 그 말씀대로 이뤄지게 하옵소서.”

하지만 평안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니가타 공항에서 하바롭스크로 갈 러시아항공기인 아에로플로트를 보니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김포공항을 떠날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며 활주로에 선 러시아 항공기를 보니 살아 있는 호랑이를 마주하고 있는 듯했다. 비행기 위에 적힌 러시아 알파벳이 눈에 들어오자 “드디어 현실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극도로 긴장하니 괜히 러시아인들의 몸이 크게 느껴졌다. 마음속에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정말 저들 앞에서 영적인 지도자로 설 수 있을까. 저들은 나를 얼마나 작고 초라한 동양인이라 느낄까.” 절망적인 생각이 들었다. 골리앗 앞에 떨던 사울의 군사들처럼 출발선에서부터 떨고 있었다. 초조해하던 내 마음을 다잡게 한 건 다윗의 고백이었다.

“저들에게 나아가는 것은 신장이 작은 내가 아니다. 살아 계신 만군의 여호와 이름으로 가는 거다.” 이렇게 생각하자 내 마음이 한결 가볍게 느껴졌다.

아에로플로트의 거대한 몸통은 굉음을 내며 움직였다. 기내 서비스를 담당하는 승무원의 체격이 정말 컸다. 미소조차 없어 군인 같은 모습이었다. 승무원들의 기세에 눌려 궁금한 것도 질문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비행 도중 러시아인들이 갑자기 옷들을 주섬주섬 꺼내 입는다. 기내 공기가 갑자기 차가워져서다. 공기만으로도 이곳이 러시아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비행기는 하바롭스크 공항에 닿았다. 밖은 이미 어둑해 저녁때였다.

그렇게 기다려온 땅이었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요동쳤다. ‘어렵게 도착한 이 땅에 입이라도 맞출까’라는 낭만적인 생각도 품었다. 그러나 내 앞에 펼쳐진 세상은 몸과 마음을 굳어 버리게 만들었다.

영적군사의 모습 대신 두려움 엄습해

비행기를 내리자마자 차가운 공기가 확 밀려왔다. 폐 깊숙이 파고드는 싸늘한 느낌이었다. 날 얼게 한 것은 찬 공기뿐이 아니었다. 공항에 완전무장한 군인들이 도열해 있었다. 승객은 군인이 서 있는 사이로만 걸어 공항 대합실로 들어가야 했다.

놀란 마음을 애써 누그러뜨리며 긴장을 풀려 해도 쉽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공항 분위기 때문이었다. 마치 강제수용소에 끌려온 기분으로 수속을 준비했다. 모든 일을 예측할 수 없어 홀로 망망대해에 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길게 줄을 서 순서를 기다렸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됐다. 국경수비대 군인 앞에서 애써 입가에 미소를 띠려고 노력했다. 입국 수속을 담당한 국경수비대원이 몇 번이고 나를 쳐다봤다. 그럴수록 불안해진 내 입 꼬리는 위를 향했다. 애처로운 수고가 통해서일까. 예리한 눈으로 째려보던 국경수비대원이 큰소리를 내며 내 여권 위에 도장을 찍었다. 통과다. 드디어 러시아 입국이 허락된 것이다.

이민가방 3개를 힘겹게 끌고 공항 밖으로 나왔다. 입국이 됐다는 사실에 흥분한 나는 만나기로 약속한 동료 선교사를 사방으로 찾았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그가 보이지 않았다. 순간 두려움이 온몸을 감쌌다. “곧 오겠지.” 수십 번을 스스로 다독거리며 위로해도 불안감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목이 빠져라 기다려도 보이지 않았다. 밤 10시쯤 되자 공항직원도 거의 퇴근했다. 끝내 공항에는 나 홀로 남았다. 당장 러시아를 복음으로 점령할 것처럼 기세등등하게 외쳤던 영적군사의 모습이 아니었다. 여기서 난 그저 생명에 위협을 느끼며 홀로 남은 이방인일 뿐이었다.

작은 동양인이 여행가방을 꼭 쥐고 서 있는 모습을 본 택시기사가 뭐라 집요하게 물었다. 그런데 도통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선교회에서 러시아어를 공부할 땐 굉장히 잘한다고 칭찬받았는데. 정작 현장에서 내 실력은 바닥이었다. 어떤 말도 들리지 않을 뿐 아니라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문득 김영국 장로께서 내게 하바롭스크 주소를 준 기억이 났다. 김 장로는 절체절명의 위기일 때 이곳으로 연락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했었다. 가방 꾸러미에서 어렵게 쪽지를 찾았다. 택시 기사에게 쪽지를 보여주며 물었다.

“하라쇼(러시아어로 좋다, 괜찮다는 의미)?”

“하라쇼!” 주소를 한참 들어다보던 뚱뚱한 택시기사가 미소를 띠며 답했다.

당시엔 휴대전화가 없어 나오기로 한 이에게 전화해볼 수도 없었다. 패잔병이 돼 포로로 끌려가는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사방이 캄캄한 밤길에서 택시기사가 목적지에 맞게 가는 건지도 의구심이 들었다. 산속에 차를 세운 뒤 선교비와 생필품이 든 가방을 빼앗진 않을까 불안했다. 손에 땀이 나고 힘이 들어갔다.

창가에 띄엄띄엄 불빛이 비췄다. 주택단지로 들어온 듯했다. 어두운 골목길을 달리던 택시는 한 고층 아파트 앞에 멈췄다. 택시기사가 아파트 안으로 걸어 들어가더니 한 동양인을 데려왔다. 그 동양인은 극도로 긴장한 내게 한국어로 말을 걸었다.

“서울에서 왔시유(서울에서 오셨습니까)?” 고려인이었다. ‘이제 살았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들린 한국어는 내게 한 줄기 희망 같았다.

러시아 나홋카 박광배 선교사

박광배 선교사 약력 △1958년 경북 예천 출생 △86년 총신대 신학대학원 졸업 △2009년 미국 리폼드 신학교 박사 △91년 소련선교회 파송으로 러시아 연해주 나홋카 현지인 사역 시작 △91년 나홋카예수사랑교회 설립 후 로마노브카, 프랄로브카를 비롯한 연해주 농촌지역 5곳에 개척교회 설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