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12개 지도 뒤에 숨겨진 세계사 12 장면
입력 2014-02-21 02:32
욕망하는 지도/제리 브로턴/알에이치코리아
오늘날 지도는 정확한 관측에 따라 지리적 지형을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그린다. 하지만 과거 지도는 달랐다. 역사상 중요한 지도들은 그 자체가 정치적 산물이었다. 지도 제작자가 세상을 보는 관점에 따라 당시 인간 인지능력의 한도 안에서 취사선택한 결과를 담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시대와 공간에 따라 저마다 다른 기준이 적용됐다.
책은 영국 퀸메리대 제리 브로턴 교수가 역사상 영향력 있는 세계지도 12개 뒤에 숨겨진 제작자와 사용자의 욕망을 파헤친 역사서다. 저자는 “지도 없이는 절대 세계를 이해할 수 없지만 동시에 하나의 지도로 세계를 분명히 표현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기원전 700∼500년경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최초의 세계지도 바빌로니아의 점토판부터 2012년 구글어스에 이르기까지 총망라해서 들여다본다. 역사상 중요한 지도에서 과학 교류 신앙 제국 돈 발견 평등 정보 등 12개의 코드를 읽어낸다.
가령 13세기 제작된 영국의 ‘헤리퍼드 마파문디’는 기독교 신앙이 절정이던 중세의 세계관을 그대로 보여준다. 지리학적 사실보다 성경에 모순 되지 않는 현실 세계를 보여주는데 천착한 이 지도는 종교적 믿음이 지도에 고스란히 투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은 세계 지도를 국가별로 그리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인류 역사상 국가별 지도가 최초로 등장한 것은 18세기 프랑스에서였다. 카시니 드 튀리는 1756년 정확한 측량법을 동원해 처음으로 나라 전체를 담은 프랑스 지도를 만들었다. 이 지도는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프랑스’라 불리는 곳을 보며 스스로를 그 안에 사는 시민으로 여기게 끔 하면서, 국가의 개념을 시각적으로 담아냈다.
12개의 코드 모두 하나같이 흥미롭지만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제국’이란 코드로 1402년 조선이 만든 세계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이하 강리도)’를 다룬 장이다. 권근(1352∼1409)이 이끄는 왕실 천문학자들이 만든 이 지도는 동아시아에서 제작된 현존하는 세계 지도 중 가장 오래됐다. 저자는 “조선을 표현한 최초의 지도이고 아시아에서 최초로 유럽을 표시한 지도”라며 “비단에 화려한 색채로 제작된 ‘강리도’는 아름답고 대단히 인상적”이라고 소개한다.
기독교권 지도들은 방위상 지도 위쪽이 동쪽을 가리켰고, 이슬람권 지도의 대부분은 지도 위쪽을 남쪽으로 삼았다. 이와 달리 강리도는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것처럼 지도 위쪽에 북쪽을 뒀다. 지도의 중심에는 조선이 아니라 중국 대륙이 거대하게 그려져 있다. 지도 아래 오른쪽에는 일본이 등장한다. 저자는 이 지도를 통해 동아시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중국이라는 제국 밑에서 ‘위성 왕국’ 조선이 어떻게 존재감을 유지했는지를 살펴본다.
저자는 권문이 강리도에 붙인 48줄의 발문에서 강리도의 제작이 중국 지도 제작에 영향 받았음을 인정하는 대목을 찾아낸다. 실제로 12세기 제작된 ‘우적도’와 ‘화이도’ 등 중국의 지도 제작 관행을 살펴본 뒤 “강리도는 세계 최강의 고대 제국에 지도 제작으로 대응한 것으로, 강리도와 그 사본은 작지만 당당했던 새 왕조가 덩치가 훨씬 큰 제국의 영역 안에서 자리매김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었다”고 의미를 부여한다.
뿐만 아니라 강리도를 통해 풍수를 중시하고, 전근대 세계에서 유일하게 자국 영토 모양의 화폐를 이용했던 나라 조선의 면모를 포착해낸다. 그가 읽어낸 제국 중국과 위성국가 조선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저자는 “한국이 기원전 4세기가 시작될 무렵부터 독립 왕국으로 탄생한 이래 통치자와 학자들은 국정 운영, 과학, 문화 등에서 더욱 거대하고 강력한 이웃 나라의 문명을 보며 영감을 얻었다”며 “결코 수동적인 관계만은 아니었으며, 한국은 정치 자립을 끊임없이 주장하면서도 중국 문화에서 자국에 이롭겠다 싶은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가져다 썼다”고 적고 있다.
이렇듯 다양한 지도들은 유럽과 아시아 문명이 당시 보유하고 있던 세계관을 통찰해볼 계기를 제공한다. 책머리에 해제를 쓴 김기봉 경기대 사학과 교수는 이것들을 보면서 오늘날 역사학의 한계로 꼽히는 근대와 유럽 중심주의를 극복해야 할 근거를 재확인한다. 아시아에서 최초로 유럽을 표시하면서, 유럽을 변방에 배치한 강리도에 주목한다. “유럽을 지방화하기가 유럽 중심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지리학적 전제가 된다면 강리도는 분명 그 같은 포스트 식민주의에 입각해 역사를 사유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이창신 옮김.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