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강은교] 처마의 향기
입력 2014-02-19 01:36
봄이 오는 길목에 서 있는 요즘이 분명한데, 눈 때문에 전국이 야단이다. 무너지는 지붕들 천지다. 그렇다 해도 이 이야기는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 어찌 보면 이것이 없어서 오늘의 현대식 지붕들은 더 무섭게 된 것이 아닐는지. …처마이다.
아마 그날은 오랜만에 눈이 내린 다음날, 아니 다음다음날쯤 되었던 것 같다. 눈이 그친 뒤 하얀 눈이 소복소복 쌓인 창밖을 보다 나는 한소리를 들었다. ‘똑-똑-’하는 소리였다. 무슨 소리일까 하고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다가가다 보니 거실 한구석에 있는 창에 이르게 되었다. 거기 서서 다시 소리에 귀 기울이다 문득 나는 그 소리가 눈이 ‘똑-똑-’거리며 녹아내리는 소리임을 깨달았다. 나는 한참동안 창 앞에 서서 그 ‘똑-똑-’거리는 눈의 소리를 들었다.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듣는 눈 녹는 소리. 그것에서는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부드러운 발소리가 다가오는 것도 같았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흰코고무신 발자국 소리처럼 소리 안 나게 살며시 밟아오는 발자국 소리…. 결혼한 이후 아파트라는 주거형태에만 나를 담고 살아오다 보니 오랫동안 눈 녹는 소리를 듣지 못했었기 때문에 그날의 눈 녹는 소리는 거의 황홀했다.
아파트라는 건물은 수직이라는 그 건축물의 구조상 ’하늘의 필터‘ 역할을 하는 처마가 없으니 눈 녹는 소리라든가 비가 지붕을 훑어내리는 소리가 ‘똑-똑-’거리며’ 들릴 리 없다. 또 처마가 없는 아파트라는 공간은 비가 주룩주룩 내려도, 눈 녹는 소리가 ‘똑-똑-’거려도 이중창을 닫으면 그런 미세한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아니 들리지 않을수록 차단 기능이 높은 고급 창유리를 썼으므로 비싼 공간이 된다. 아무튼 그날 눈 녹는 소리는 나를 ‘머나먼’ 유년 시절로 데리고 갔다. 거기 처마 밑엔 어린 내가 여러 어른과 함께 서서 흐린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네 삶이 도시화되면서, 또 도시가 고층화되면서 잃은 것이 어디 한두 가지이랴만 그 잃어버린 것의 목록 속엔 눈 녹는 소리, 비의 몸이 부딪는 소리 같은 것도 넣어야 하리라.
그 어떤 밍크코트보다 따뜻하게 했던, 처마가 만든 부드럽고 순결한 소리. 다정한 마음들이 넘치는 골목들은 그 시절, 키를 넘는 폭설에도 외롭지만은 않았으리라. 누군가 ‘홀로’ 눈을 치우느라 고생하지도 않았으리라. 처마에 여러 사람이 들어서서 잠시 비를 또는 눈을 피하듯 ‘여럿이서’ ‘함께’ 눈을 치웠으리라.
강은교(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