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바르트 한국어판 방대한 전기 첫 출간… 그의 신학과 삶, 진면목 제대로 본다
입력 2014-02-18 01:37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마르틴 루터, 칼뱅, 슐라이어마흐의 뒤를 잇는 20세기 신학의 교부(敎父).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에 종지부를 찍은 개신교 신학자. 신정통주의(neo-orthodoxy)의 창시자. 보수·진보 양진영의 가혹한 비난의 대상. 스위스와 독일에서 활동한 신학자, 칼 바르트(1886∼1968)가 되살아났다. 생생한 전기에서다.
최근 출간된 ‘칼 바르트’(복있는사람)는 그의 마지막 조교(1965∼1968) 에버하르트 부쉬가 1975년 스승의 편지와 회고록을 기초로 재구성했다. 이 전기가 39년 만에 한국어로 빛을 본 것이다. 935쪽에 이르는 전기 출간으로 바르트의 진면목을 다시 봐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자유주의에 심취했던 초기 시절=바르트는 1886년 5월 10일 스위스 바젤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는 베른에서 청소년기를 보냈고 16세 때 장로교회의 입교식인 견신례(confirmation)를 받은 날 신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신앙고백을 학문의 길을 통해 제대로 이해해보고 싶다는 희망이었다.
그는 1904년 부친이 교수로 있던 베른대 신학과에 입학했다. 보수적인 아버지와는 달리 그는 자유주의 사상을 탐닉했다. 이매뉴얼 칸트는 신학생 시절의 안내자였다. 이후 베를린과 튀빙겐, 마르부르크 등지에서 공부할 때는 고전적 자유주의 신학자, 리츨을 계승한 빌헬름 헤르만의 제자가 됐다.
그는 1908년 개혁교회 목사직을 위한 안수를 받았고 제네바에서 수련목회를 시작했다. 칼뱅이 강의했던 설교단에 서기도 했는데 당시 그의 설교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학문적이었다. 그는 나중에 회고하기를 ‘엄청난 미숙함과 무모한 확신 속에서 목회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러다 1911년 대학생 선교사이자 조직가였던 존 모트를 만났고 그의 복음화 열정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또 제네바 시민들의 도박금지에 찬성하면서 ‘결연한 부정을 통해 하나님나라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 교회가 할 일’이라고 인식했다.
◇자펜빌 목회 시절과 대전환=당시 그는 스위스와 독일 국경 지대인 자펜빌 교회의 목사가 됐다. 자펜빌은 바르트 신학의 역사가 만들어진 곳이다. 목회 초기엔 여전히 자유주의신학을 답습했지만 차츰 자유주의신학이 쓸모없는 것임을 발견했다. 직접적 계기는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그는 전쟁 찬성자 93명에 그의 스승이었던 하르낙과 헤르만 등의 이름이 올라와 있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그는 “어떻게 종교와 학문이 모조리 지성의 42㎝ 대포로 둔갑하는지를 보았을 때 나는 신들의 황혼을 경험했다”고 기록했다.
당혹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던 바르트는 해답을 찾아 나섰다. ‘로마서 주석’(1919) 작업은 이때부터 착수했다. 바르트는 한번도 읽어보지 못한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적었고 읽고 또 읽고 쓰고 또 썼다. 당시 신학자들은 ‘로마서주석’을 “신학자들이 노는 놀이터에 떨어진 폭탄”이라고 평했다. 그는 여기서 “복음과 영원, 구원에 대한 진리는 인간 이성으로 세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오는 것이므로 순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1년 출간된 ‘로마서 주석’ 제2판은 ‘변증법적 신학’ ‘말씀의 신학’이라는 꼬리를 안겨줬다. 변증법적이라는 표현은 인간에게 절대적인 존재로 다가오시는 하나님과 인간의 대화 속에서 일어나는 사유를 의미했다. 그의 신학은 격동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고백교회에 참여하다=로마서 주석의 성공으로 그는 독일 괴팅겐대 교수로 초빙을 받았다. 이후 뮌스터대와 본대학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긍정을 더 강조했다. 1927년 ‘교의학 서설’을 탈고했고 1932년에는 ‘교회교의학’ 1권을 출간했다. 교회교의학은 조직신학서로 바르트가 1968년 사망할 때까지 13권을 쓰다가 미완으로 끝났다. 이 책은 바르트가 진정한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만을 해설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확신으로 집필했다.
1930년대 초 바르트는 독일의 고백교회에 참여했다. 독일 교회 자체를 국가사회주의에 맞게 획일화하라는 요구에 저항한 것이다. 그는 당시 신학생들에게 “모든 자연신학에 작별을 고하고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께만 매달려야 한다”고 말했다. ‘오늘의 신학적 실존’이라는 글에서는 “교회는 인간을 섬기는 것도 아니고 독일 민족을 섬기는 것도 아니며 오직 복음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그의 이런 입장은 고백교회 1차 총회에서 채택된 ‘바르멘 선언’에 연결됐다. 그는 히틀러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서약을 거부한 이유로 1935년 본대학 교수에서 해임됐다.
스위스 바젤대 교수로 자리를 옮긴 그는 27년간 가르쳤고 교회교의학을 계속 집필했다. 1962년 75세의 나이로 퇴임한 그는 미국을 여행하며 강연했다. 1968년 12월 9일 그는 강연 원고 집필을 마지막으로 숨을 거뒀다.
바르트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열정의 소유자였다. 괴팅겐대에서 그는 오전 7시 강의를 위해 새벽 3∼5시까지 준비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런 열정의 바탕에는 한 가지 원칙이 작용했다. 그때그때 일차적으로 요구되는 일을 슬쩍 회피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토론과 세미나도 좋아해 일주일에 한 번씩 토론 시간을 가졌다.
그는 엄한 교수였다. 학생들에게 꼼꼼하게 세미나를 준비하도록 요구했고 시험에서는 종교개혁과 개신교 정통교리에 대해 정확한 지식을 요구했다. 바르트의 수많은 명언 가운데는 위기를 맞고 있는 한국교회에 직접 대입 가능한 것도 다수 발견된다.
강영안(서강대) 교수는 “정치 현실에 그토록 많은 관심을 가졌음에도 정치운동이 아니라 ‘교회교의학’을 통해 인류에 공헌하고자 했던 한 신학자의 삶과 사상을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