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규 시집 ‘무작정’
입력 2014-02-14 01:34
“무작정(無作亭) 한 채가 무작정 지어졌다. 몇 권의 시집을 더 짓게 될지 그 상거를 짐작하기 어렵다. 이 시집을 내는 시점이 또한 남다르기도 하다. ‘현대시학’ 25년의 내 역정을 마감했다. 그 백비(白碑)로 이 시집을 대신한다.”
사반세기 동안 이끌어온 월간 시전문지 ‘현대시학’ 주간 직을 지난해 말 내려놓은 정진규(75·사진) 시인의 신작 시집 ‘무작정’(시로 여는 세상)은 우주만유의 진리가 바로 옆자리에 놓여있어도 알아보지 못하는 회한 같은 걸 내비친다. “왜 있잖은가 드넓은 만주벌판 불콰한 지주가 생각난다 평생 소생이 없으셨던 옆집 할머니께 괜히 죄송하다 어찌 사건이 아니랴, 생산! 이 소생들, 할머니의 일생을 훔쳤다”(‘우리 내외는 손이 걸다’ 부분)
경기도 안성에서 아내와 함께 텃밭을 가꾸던 시인은 고추며 아욱이며 오이며 가지 등을 소출 하던 자신과 아내의 손이 걸다는 것을 문득 소생이 없어 평생 외롭게 살아온 옆집 할머니를 보면서 자각하는 장면을 이렇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옆집 할머니가 자식을 얻지 못한 게 어쩌면 텃밭 농사를 질펀하게 짓고 있는 ‘나’ 때문이라는 듯, 시인은 한순간 회한에 잠긴다. 하지만 그 회한은 회한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윤리의식과 타자에 대한 연민으로 승화되면서 옆에 있는 사물이나 만유에 깃든 진리를 체득하는 경지로 나아간다. 그런 체득의 경지를 시인은 이제 나이 들어 사물에 복종하고 순종한다는 ‘종순(從順)이라는 단어로 돌려 말하고 있다.
“맞춤 식탁 하나를 노후 선물로 받았습니다 나는 맞춤 식탁에서 밥을 먹습니다 이 식탁에 앉으면서부터 또한 우아하고 소중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중략) 생가의 땅, 고추와 오이와 가지는 종순(從順)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도 반찬 두세 가지 국 한 그릇이 이렇게 화려할 수가 없습니다 자족과 겸허의 아름다움을 알았습니다”(’맞춤 식탁‘ 부분)
시인은 땅에 종순하는 고추와 오이와 가지를 보면서 미물에 불과한 그 채소들마저 맞춤 식탁에 앉아 있다고 느끼는 자신의 심정을 고백체로 들려주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인은 사물들의 맞춤 식탁에 ‘나’를 앉히고 사물의 질서 안에서 종순하는 자아를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