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론서 4만명 예루살렘 귀환했지만 유다의 고난 계속돼
선지자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백성들에게 유다의 마지막 날이 가까워왔음을 선포했다.
“이 성에 머무는 자는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으리라. 그러나 갈대안인에게 항복하는 자는 살리니 그는 노략물을 얻음같이 자기의 목숨을 건지리라. … 이 성이 반드시 바벨론의 왕의 군대의 손에 넘어가리니 그가 차지하리라.”(예레미야 38:2∼3)
예레미야의 예언을 들은 장관들은 시드기야 왕에게 달려가 예레미야가 백성의 마음을 혼란시키며 군사들을 약하게 만들고 있다고 고자질했다. 결국 왕의 명령에 따라 장관들은 예레미야를 끌어다가 감옥 뜰에 있는 흙구덩이에 던져 넣어 버렸다(렘 38: 4∼6). 이때 이 모함에 가담한 장관들은 맛단의 아들 스바댜, 바스훌의 아들 그다랴, 셀레먀의 아들 유갈 그리고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이었다.
2005년과 2008년 히브리대학교 에일랏 마잘 교수가 다윗성을 발굴하면서 바벨론이 파괴한 폐허 속에서 당시 예레미야를 모함한 장관들 중 셀레먀의 아들 유갈과 바스훌의 아들 그다랴의 불라(bulla·인장이 찍혀 있는 점토덩어리)를 발견했다. 왕의 장관들은 분명 예레미야가 예언했던 유다의 마지막을 현장에서 경험했을 것이다. 바벨론의 칼과 기근과 전염병 속에서 죽었거나 바벨론으로 끌려간 포로가 되었을 것이다.
예루살렘은 멸망했다. 바벨론은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했다. 성전 안의 기물들도 약탈했다. 백성은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그렇게 유다는 사라졌다. 예레미야와 많은 선지자들은 분명 유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리라는 것을 예언했지만, 유다가 멸망한 주전 586년의 강대국 바벨론의 막강한 힘 앞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바벨론의 권력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주전 539년 페르시아의 왕이 된 고레스는 난공불락이라 불리던 바벨론성을 함락했다. 고레스의 정책 중 하나는 바벨론의 포로로 있는 외국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성서에 기록된 것처럼(스 1:1∼4, 대하 36:22∼23) 유다 사람들도 이 행렬의 하나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고레스의 죽음으로 귀환 정착은 연기되었고 주전 522년 왕이 된 다리우스가 귀향 정책을 실행했다. 에스라 2장의 숫자를 계산했을 때 귀환자는 4만명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제2 성전 건축
고레스는 유다 땅을 통치하도록 스룹바벨을 장관으로 임명하였다. 주전 538년 스룹바벨과 함께 4만명이 넘는 귀환자들이 4개월의 긴 여정을 거쳐 마침내 유다 땅으로 돌아왔다. 유다 사람들이 돌아왔을 당시 예루살렘의 인구는 1500명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사실상 성벽도 없는 작은 마을과 거의 비슷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바벨론에 의해 파괴된 도시는 당시까지도 복구되지 못했다. 히스기야가 포함시켰던 예루살렘의 서쪽 언덕은 황폐한 가운데 버려졌다. 그들이 돌아와 예루살렘을 다시 유다의 중심지로 바꾸었지만 사정은 그리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 성전산과 다윗성 자리에서만 거주의 흔적이 발견될 뿐이었다. 에일랏 마잘 교수는 다윗성 안의 G구역에서 이 시대에 세워진 벽의 일부분을 찾아냈다. 스룹바벨과 유다 사람들은 그들의 사비를 털어 먼저 하나님의 제단을 세웠다. 그리고 성전 건축이 시작되었다. 예레미야가 말했던 것처럼 바벨론으로 끌려간 지 70년 만에 유다는 솔로몬이 세웠던 하나님의 성전 자리에 다시 성전을 세웠다.
일반적으로 유다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솔로몬이 세운 후 주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 무너진 성전을 제1 성전이라고 부르며 스룹바벨이 건축하고 주후 70년 로마에 의해 무너진 성전을 제2 성전이라고 부른다. 성전은 다리우스 왕 재위 6년 즉 주전 516년 아달 월 셋째 날 완성되었고 성전 봉헌식이 이루어졌다(스 6:15∼16). 성전은 고레스왕의 명령대로 높이와 너비 각각 60규빗(약 30m)에 이르도록 지어졌다(스 6:3).
에스라 5장 14절에 따르면 바벨론 왕이 약탈했던 성전의 기물들도 고레스의 명령으로 예루살렘 성전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제1 성전 즉 솔로몬의 성전에 있었던 기물들이 모두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솔로몬의 성전에 있었던 것 중 없는 것들도 있었다. 유대 전통을 기록하고 있는 미쉬나에 의하면 법궤는 바벨론에 의해 타 버렸다. 대신 법궤가 있어야 하는 자리에는 성전의 기초석이 놓였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시대에 세워진 성전의 자취는 지금으로선 찾아내기가 어려워졌다. 예루살렘의 성전이 있었던 바로 그 자리에 현재는 이슬람 사원이 있다.
알렉산더의 점령 이후 예루살렘
유다는 독립국가는 아니었다. 여전히 페르시아의 통치를 받는 속국이었다. 왕도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현대의 유대인들 사이에서 그런 것처럼 예루살렘의 성전은 그들의 종교적 민족적 중심 역할만 할 수 있었다.
주전 332년 전쟁의 바람이 또 한 번 예루살렘을 휩쓸었다. 그리스 에게문명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이집트는 물론이고 바벨론까지 이르는 중동 지역을 점령했다. 예루살렘도 마케도니아 군대의 칼바람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주전 325년).
하지만 알렉산더는 자신의 권력을 충분히 누리지는 못했다. 그는 자식을 남기지 못한 채 주전 323년 죽었다. 그의 영토는 그의 장군들에 의해 나뉘어 프톨레미와 셀루시드 왕조가 통치하게 되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 땅은 주전 198년까지는 프톨레미의 통치를 받았다.
프톨레미 통치 시대의 유다는 예루살렘의 아래 남쪽 지역에서 제사장을 중심으로 하는 독립적인 자치 구역으로 남았다. 아람어로 유다라는 뜻을 가진 예후드(YHDH)가 기록된 동전을 사용한 흔적도 있다. 유다인들 사이에 상업적인 거래가 있었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동전에는 주로 꽃잎 세 개로 이루어진 백합화 모습이 새겨져 있지만 독수리라든가 올빼미 심지어 사람의 형상들도 나타나 있다. 이는 다양한 신을 믿고 형상들을 만드는 헬라문명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형상을 새기지 말라는 성경의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유다인들의 문화는 이미 헬라문명에 깊이 젖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주전 198년 셀루시드의 안티오쿠스 3세가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안티오쿠스 3세는 유다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자신들의 제사를 지내고 제사장들이 그 제물을 갖도록 허락했다. 그러나 셀루시드 왕조의 헬라문명은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땅에 점점 더 심하게 관여하기 시작했다. 헬라 신들을 섬기지 않고 다른 신전에 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셀루시드 왕조가 통치하는 땅은 헬라문명을 따라야만 했다.
유다의 제사장들 중에는 이러한 헬라문명을 사랑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헬라의 엘리트가 되고자 노력했다. 대제사장 중 야손(Jason)의 경우 예루살렘을 헬라 도시로 만들기 위해 짐나지움(그리스의 운동 연습장)이나 극장처럼 유대교 전통과는 거리가 먼 시설들을 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제사장들 중에는 유대교 전통에 충실한 보수적인 이들이 남아 있었다. 이들은 우상숭배를 거절하고 성전의 제물을 셀루시드 왕조에 보내지 않았다. 결국 주전 167년 안티오쿠스 4세는 더 이상 유다인들이 그들 자신만의 제사를 드리고 그들의 전통을 지켜나가지 못하도록 금지령을 내렸다. 심지어 돼지의 피를 성전에 뿌렸다. 돼지는 유다인들이 가장 불경하게 여기는 동물이다.
이 사건은 유다인들에게 오히려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예루살렘 서쪽에 위치한 모디인이라 불리는 보수적인 제사장들이 그 중심에 섰다. 이들은 ‘마카비(망치)’라는 별명을 가진 제사장 마티티아스를 중심으로 셀루시드 왕조에 반기를 들었다.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터치바이블 대표·서울신학대학교 한세대학교 강사>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예루살렘 ⑤유다 멸망 이후
입력 2014-02-14 02:32 수정 2014-02-14 17: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