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꿈 꿨던 건축가, 자연에 집을 짓다… 국립현대미술관 ‘이타미 준:바람의 조형’

입력 2014-02-11 01:32


요즘 사진 전시와 더불어 건축 전시도 인기다. 건축가의 실제 건축물을 전시장에 옮겨오지는 못하지만 설계도와 드로잉 등 각종 자료를 통해 공간에 스며있는 예술과 철학을 살펴볼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경기도 과천관에서 7월 27일까지 여는 ‘이타미 준: 바람의 조형’ 전에 관람객이 몰려들고 있다. 지난해 건축가 정기용(1945∼2011) 전시에 쏟아진 열풍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세계적인 건축가 이타미 준(한국명 유동룡·1937∼2011)은 재일교포라는 신분 때문에 일본에서 일정 기간마다 외국인 등록을 위해 10개 지문을 모두 날인해야 하는 불편함과 수모를 겪었다. 유(庾)씨 성은 일본에선 쓰이지 않는 한자여서 사용할 수 없었다. 예명인 이타미 준(伊丹潤)은 오사카의 공항이름이던 이타미(伊丹)와 절친한 사이였던 음악인 길옥윤의 윤(潤)을 조합한 것이다.

그는 원래 화가를 꿈꿨다. 그러나 “그림 그려서 먹고 살기 어렵다”는 아버지의 권유로 건축가가 됐다. 하지만 이우환 곽인식 등 1970년대 일본에서 활동한 모노하(物派) 화가들과 어울렸다. 모노하는 돌·물·나무 등의 소재를 점·선·면 등의 기법으로 표현하는 새로운 미술사조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자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건축은 자연과의 조화를 강조한다.

그는 70년대 작업 초반에 흙, 돌, 금속, 유리, 나무 등의 소재를 콘크리트와 대비함으로써 소재 자체의 물성을 찾고자 했다. 그러다 80년대 후반부터 돌을 중심으로 묵직한 건축을 추구했다. 일본 도쿄 한복판에 들어선 ‘M빌딩’은 건축의 원시적인 형태에 의미를 두고자 했던 작업이다. 90년대에는 건축과 사람의 관계에 관심을 두어 작품이 한층 온화해졌다.

그는 평생 동안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바다를 동경했던 그는 제주에 우연히 들렀다가 풍광에 반해 ‘제2의 고향’으로 삼았다. 2000년대 들어 바람, 물, 돌 등 자연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제주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제주의 환경을 활용한 수(水)·풍(風)·석(石) 미술관, 오름 사이의 마을을 포도송이처럼 옮겨놓은 포도호텔, 물 위에 뜬 배를 닮은 하늘의교회(방주교회) 등이 대표적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일본에서 작업한 작품부터 숨지기 직전까지 작업한 드로잉, 스케치, 회화, 영상, 모형 등 500여점을 선보인다. 그는 드로잉에 대해 “내 건축의 단면이라고 할 수도 있고, 내 삶에 보내는 언어로서 내 사고의 답답함과 호흡하기도 한다”고 했다. 연필로 꼼꼼하고 치밀하게 묘사한 드로잉은 그의 필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케 한다.

전시장 벽은 그가 즐겨 사용했던 나무와 돌로 마감하는 등 곳곳에 건축가의 느낌을 담고자 했다. 전시장 한 쪽에는 도쿄의 이타미 준 건축사무소 내 아틀리에 공간을 재현했다. 평생 일본에 귀화하지 않을 정도로 한국에 대한 긍지가 강했던 그의 여권, 그에게 영감을 준 도자기와 민화도 전시된다. 한글 자음의 읽는 법을 가타카나로 적은 메모지도 나왔다.

그의 전시가 호응을 얻는 것은 우리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건축의 기능과 미학에 대해 되새겨 보게 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건축사무소를 운영하는 큰딸 유이화씨는 “아버지가 생전에 한국에서 귀국전을 열고 싶다고 수차례 말했는데 이번에 회고전이 마련돼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전시가 조금 더 일찍 열렸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다(02-2188-0650).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