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人터뷰] 대검 전문가 강정기 수사관 “화재 현장 항상 엉망진창 억울한 피해자 없어야죠”

입력 2014-01-18 02:39


2009년 11월 14일 오후 2시26분. 부산 중구 신창동 국제시장의 6층짜리 건물에서 불이 났다. 원인은 알 수 없었다. ‘가나다라 실내 실탄사격장’에서 발생한 이 화재로 일본인 관광객 등 15명이 숨졌다. 화재 현장에서는 한국 언론뿐만 아니라 일본 취재진도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경찰, 소방당국, 국가정보원, 전기안전공사 등 수많은 기관의 책임자들이 화재 원인을 조사하기 위해 동원됐다. 전담수사팀이 꾸려졌다. 당시 부산지검 형사부 소속 강정기(42) 수사관도 전담팀에 투입됐다.



“막막했다. 화재사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때였다. 그냥 까맣거나 하얀 것은 재, 빨간 건 불이라고 생각하는 수준이었다.” 13일 대검찰청 별관 3층 식당에서 만난 대검찰청 국가디지털포렌식센터(NDFC) 화재수사팀 강 수사관은 억센 경상도 사투리로 말했다. 사격장 화재 당시 강 수사관은 주임검사와 함께 40여일간 현장을 조사하고 화재 발생 상황을 재연했다. 화약잔사(총을 쏜 다음 발생하는 노란색 부산물)를 확인하기 위해 80여발의 실탄을 쏴봐야 했다. 강 수사관은 “솔직히 말하면 다시는 화재사건 현장 근처에도 가기 싫었다”고 말했다.

그를 매료시킨 것은 화재사건의 특징이었다. “화재·폭발 사건은 대개 한 번으로 끝난다. 하지만 한 번 불이 나면 많은 사람이 죽고 재산피해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다. 그런데 증거는 거의 없다. 불에 다 타버리는 데다 불을 끄기 위해 물을 쏘니 현장은 이미 엉망진창인 상태다.” 한 번의 사고로 큰 피해가 발생하지만 원인은 알아내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피해자도 사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강 수사관은 “원인도 모른 채 죽은 피해자들은 얼마나 억울하겠는가”라고 말했다. ‘억울한 피해자가 없도록 하자’는 소신도 생겼고, ‘검찰에도 화재 사건을 전담하는 전문팀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갖게 됐다.



2010년 1월 대검 NDFC에 화재수사팀이 신설됐다. 강 수사관은 창립멤버로 지원했다. 이름은 화재수사팀이지만, 강 수사관과 파견된 소방관 두 명이 팀원인 소규모 조직이었다. 사실상 강 수사관 1인 조직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때부터 강 수사관의 고군분투는 시작됐다. 우선 중앙소방학교에서 12주간 기본적인 화재조사관 교육을 받았다. 이후에는 미국에서 화재사고 교과서라 불리는 ‘NFPA921’이라는 책을 붙들고 씨름했다. 궁금한 부분은 파견 나온 소방관들에게 물었다. 그는 “가족들은 부산에 두고 서울에 혼자 올라와 있는 기러기 아빠가 달리 할 일도 없었다”고 했다.



강 수사관은 2010년 11월 미국의 화재폭발조사관(CFEI) 자격을 땄다. 미국과 맺은 협약으로 한국에서 시험을 볼 수 있었다. 지난해 8월 미국 플로리다로 건너가 미국 화재조사관강사(CFII) 자격증도 땄다. 미국 연수 경험도 없는 검찰수사관이 영어로 된 미국 화재전문가용 자격증을 2개나 따낸 셈이다. 강 수사관은 지금도 한 대학의 소방방재공학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중이다.



강 수사관은 굵직굵직한 미제 사건들을 여러 건 해결했다. 2002년 1월 경기도 여주의 가정집에서 불이 나 네 살배기 아이가 숨진 사건이 대표적이다. 당시 형광등 누전으로 인한 화재로 종결된 사건이었다. 9년 후인 2011년 사고에 대한 새로운 신고가 접수됐다. 아이의 아버지와 동거했던 여성은 ‘동거남이 아이 몸에 불을 질러 살해했다’고 진술했다.



강 수사관은 진술을 토대로 옛날 기록을 샅샅이 재검토했다. 침대 밑에서 사망한 아이 시신의 위치, 시신의 왼쪽에 집중된 화상 등에서 이상한 점이 발견됐다. 형광등 누전이라면 불이 천천히 진행되기 때문에 시신의 훼손이 한쪽에 집중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재수사 결과 아이의 아버지가 동거녀를 엄마라고 부르지 않는 아들에게 화가 나 머리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붙여 살해한 것으로 나타났다. 방에 휘발유는 뿌렸지만 아이에게 불을 붙인 건 아니라고 주장하던 아이 아버지는 지난해 1월 징역 10년을 확정 받았다. 강 수사관은 “당시 우리 애가 피해자 또래였다”며 “조사하면서 많이 울컥했다”고 말했다. 화재수사팀은 최근 이 같은 사례를 담은 ‘화재수사사례집’을 발간했다.

강 수사관이 가장 안타까운 부분은 대부분 화재사고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일어난다는 점이다. 그는 “불이 나도 여인숙에 많이 나지 호텔에는 잘 나지 않는다”며 “그래서 더 억울한 피해자가 없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일반적인 사건은 기록만 검토해도 화재감정서를 쓸 수 있다. 하지만 더 정확한 결과를 위해 재연실험을 자주 한다. 재연실험은 충남 아산에 폐교를 개조해 만든 소방과학연구실에서 주로 이뤄진다. 그는 화재수사팀 소방관들과 함께 직접 재료들을 사서 현장상황을 그대로 만든 뒤 불을 질러 본다. 재연 결과를 토대로 감정서를 쓴다. 결과가 충분하게 나오지 않아 재연실험을 2∼3차례 반복하는 경우도 많다.



보통 화재 현장 조사는 치열하게 이뤄진다. 화재수사팀 3명은 현장에 들어가면 서로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않는다. 3명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현장을 조사한다. 바닥을 먼저 보는 사람도 있고, 다른 곳을 먼저 살피는 사람도 있다. 강 수사관은 “내 경우는 제일 먼저 천장의 탄화 형태를 살핀다”고 말했다. 3명은 현장조사 뒤 발화지점에 대한 각자의 의견을 말한다. 의견이 일치되지 않으면 하나의 결론이 도출될 때까지 격론을 펼친다. 그는 현장조사 뒤 벌어지는 토론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증거가 별로 없는 화재현장에서 모두가 수긍하는 합리적인 결론을 찾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는 검찰에 화재수사팀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강 수사관은 “국과수나 경찰은 화재감식반을 두고 있다. 경찰 수사단계에서 검찰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수많은 관계자들의 진술과 정황 등에 대한 기록이 추가된다. 그것들을 바탕으로 반드시 교차검증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화재수사팀 3명이 서로 다른 의견을 하나의 결론으로 모아내는 것처럼, 조사기관 간에도 이런 교차검증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화재수사팀은 2011년 17건, 2012년 32건, 2013년 40건의 화재 사건을 처리했다. 해마다 처리 사건 수가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인력은 강 수사관과 파견 소방관 2명 그대로다. 강 수사관은 “후배 수사관들 중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많이 왔으면 좋겠다”며 “한 분야에서 전문적인 수사역량을 기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20년 넘게 피우던 담배를 지난해 추석부터 끊었다고 했다. 강 수사관은 “집에서도 담배꽁초 때문에 불이 나는 경우가 많으니 항상 조심하라”며 웃었다.

정현수 기자 jukebo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