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해부학의 발전… 그 뒤엔 무명의 삽화가도 있었다

입력 2014-01-17 01:32


과학의 민중사/클리퍼드 코너/사이언스북스

영국 역사가 토머스 칼라일은 “세계의 역사는 위인들의 전기일 뿐”이라고 말했다. 굳이 ‘민중사관’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인류의 눈부신 발전이 몇몇 특출한 사람 덕이 아니라는 건 오늘날의 보편적인 관념이다. 하지만 유독 과학 분야는 상황이 다르다. 우리는 지구의 자전(自傳)을 언급하면서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먼저 떠올린다. 종교재판정 안에선 무릎을 꿇었지만, 밖으로 나서며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했다는, 많은 역사가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는 일화도 빠트리지 않는다.

중력의 개념이나 만유인력의 법칙을 이야기할 때면 으레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깨달음을 얻던, 아이작 뉴턴의 모습을 상기한다. 아인슈타인과 피타고라스를 둘러싼 신화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책은 갈릴레이, 뉴턴, 아인슈타인 등 과학 발전의 공로자로 칭송받는 천재적인 소수에게 가렸던 평범한 조력자들에게 빛을 비춘다. 흥미로운 작업을 주도한 저자는 독특한 이력을 지닌 과학사학자다. 그는 미국 조지아 공대를 졸업한 뒤 1960년대 군수업체 록히드 마틴에서 엔지니어로 일했다. 영국 연수 중 우연히 현대 과학의 군사적 이용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반전 운동에 뛰어들었다가 40대 뒤늦게 학업을 시작했다. 현재 뉴욕시립대에서 강의하며 다양한 저술 활동 중이다.

이 책을 쓴 목적은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심오한 방식으로 과학을 만들어 내는 데 참여했는지” “이름도 모르는 다수의 신분이 낮은 민중들이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것보다 과학 지식의 생산과 전파에 얼마나 더 많이 이바지 했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저자는 선사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기를 망라하며 다양한 분야의 과학 지식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살펴본다.

고대 광부와 대장장이, 옹기장이들이 작업장에서 빚어낸 지식은 화학과 야금술, 재료 과학의 근간이 됐다. 수학의 발전은 수천 년에 걸쳐 측량사, 상인, 기계공, 서기와 회계사들이 수학의 토대를 만들었기에 가능했다. 식량 생산과 관련된 지식의 발달에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도착하기 전부터 살았던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들의 공이 컸고, 지리 정보와 지도 제작 기술의 발달에는 이름도 모르는 선원, 어부들의 헌신이 있었다.

특히 근대 ‘과학혁명기’로 불리는 16∼17세기, 비약적 발전을 불러온 무수한 데이터는 유럽 장인들의 작업장에서 생산됐다. 장인과 과학자들의 상호 작용을 통한 과학의 비약적인 발전이 눈부신 시대였다. 일부 장인과 기술자들은 운 좋게 협동 작업을 한 과학자들과 더불어 이름을 남길 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삽화가들의 사례가 흥미롭다. 삽화가는 해부학과 식물학의 발전 과정에서 간과할 수 없는 존재로 꼽힌다. 16세기 벨기에의 외과의사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가 1543년 출간한 ‘인체의 구조’는 해부학의 걸작이다. 과학혁명의 상징적 사건으로 여겨지는 책의 출간으로 당시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다. 어려운 내용보다 더 강한 인상을 남긴 것은 인체를 생생하게 그린 삽화 420개. 대중의 관심에 힘입어 삽화는 4세기 넘게 인쇄되며 남았지만 삽화가들의 이름은 알 길이 없다. 반면 베살리우스의 이름은 남았지만 책의 내용은 근대 언어로 번역되지 못했다고 한다.

16세기 식물학자 레온하르트 푹스가 1542년 쓴 ‘식물의 역사에 관하여’는 야생 식물 400여 종과 재배 식물 100여 종의 생생한 삽화를 싣고 있다. 당시 약초를 다룬 책들은 라틴어로 기술돼 소위 ‘배운 의사들’ 말고는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삽화 덕분에 일반인 독자와 여성들까지 약초를 알고 들판에서 골라낼 수 있었다. 이 책의 삽화를 그린 하인리히 휠마우어와 알베르트 마이어, 목판 제조공 바이트 루돌프 슈페클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지금까지 그 이름이 남아 있다.

최초의 실험 과학자로 인정받는 영국인 의사 윌리엄 길버트는 1600년 ‘자석에 관하여’로 유명해졌다. 그의 책은 그가 대장장이, 광부, 선원, 기구 제작자들의 지식에 얼마나 의존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렇듯 저자는 유럽 근대 과학의 형성기에 활약한 과학자들의 활동을 통해 이를 가능케 했던 무명의 민중을 복원시킨다. 엘리트 과학자들의 공로를 깎아내리는 과격한 책이 아니다. 그들과 수많은 익명 기술자들의 상호 협력을 통해 ‘집단 지성’을 발전시켰고, 그것이 우리가 오늘날 누리는 과학 기술의 근간이 됐음을 강조한다. 한 발 더 나아가 민중들이 이룬 과학 지식과 기술 발달의 특혜 역시 민중들을 위해, 민중들에 의해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면에서 20세기 들어 자본과 결탁한 거대과학의 등장은 우려스럽다. 저자는 고도로 전문화된 엘리트들만의 배타적 영역이 되고 있는 과학계를 이대로 둬도 될지 묻는다. “박사학위가 없는 사람들이 과학에 직접적 기여를 할 수 있었던 시대가 확실한 종말을 고했는지 생각해보자”는 그의 말은 21세기 대한민국에도 유효한 듯하다. 김명진 안성우 최형섭 옮김.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