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미출간 ‘녹지대’ 47년만에 세상밖으로
입력 2011-12-30 18:23
소설가 박경리(1926∼2008)의 미출간작 ‘녹지대’(전2권·현대문학)가 47년 만에 묶여져 나왔다. ‘녹지대’는 1964년 6월 1일부터 65년 4월 30일까지 부산일보에 연재했던 작품이다. 그동안 존재 자체가 알려지지 않았다. 2008년 서울대 국문과 방민호 교수가 서울대도서관에서 발견해 당시 박경리 문학 전체를 조망하는 논문을 쓰고 있던 제자 김은경 KAIST 교수에게 의뢰, 연재소설을 일일이 원고 파일로 만들어 복원했다.
‘녹지대’의 집필은 박경리가 소설 ‘파시’를 동아일보에 연재하던 시절과 겹친다. ‘파시’가 한국전쟁으로 인해 통영으로 흘러들어온 젊은 여성을 중심으로 전개된다면, ‘녹지대’는 역시 한국전쟁으로 인해 고아가 된 젊은 여성 하인애를 중심으로 펼쳐진다는 공통점이 있다. 여기에 ‘녹지대’는 60년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사고방식과 언어 습관이 풍부하게 재현하고 있어 동시대인들의 생에 대한 감각과 생리를 탐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소설엔 인애, 숙배, 은자라는 세 명의 이십 대 초반 여성이 등장한다. 그 가운데 인애는 전쟁 중 부모를 잃고 큰아버지 댁에 기숙하면서 새로운 삶을 찾아가는 문제적 여성이다. 작중 묘사에 따르면 ‘녹지대’라는 어두침침한 지하실의 음악 살롱이다. 인애가 시인의 꿈을 키우며, 문학청년들과 어울리는 곳이자 자신의 영혼을 송두리째 앗아갈 사랑을 만나고 결국 그와 어긋난 길을 가게 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미쳐서, 발광이 나서 다 쏟아져 나온다. 한국의 문화는 모두 이 거리 위에 쏟아져 있다! 깡통 지붕의 움막에서 엉금엉금 기어 나온 족속들의, 그래도 가짜 다이아 반지 낀 손으로 우아하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모퉁이 거리는 문명과 문화의 홍수다! 움막은 산꼭대기로 쫓겨 올라가도 이 찬란한 전시장, 명동의 거리는 확장할 필요성이 있어!”(2권 42쪽)
박경리는 60년대 명동을 이른바 ‘비트 제너레이션’의 거리로 묘파하고 있다. ‘비트’는 대중화, 통속화하는 젊은이들의 반항적 기질을 말할진대, 그 불확실성의 시대를 ‘비트’의 문체에 실어 전후 세대의 의식과 감각을 파헤치려 했던 것이다. 작가의 그런 내면이 종국에는 69년 집필을 시작한 대하소설 ‘토지’의 주인공 ‘서희’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의미를 함축하는 소설이 바로 ‘녹지대’이다.
방 교수는 “이 소설은 자신들이 담당하고 있는 시대의 불모성을 뛰어넘어 그 이후를 설계하려는 60년대인들의 심리와 의식에 관한 이야기”라며 “이들은 6·25전쟁이 부른 죽음과 폭력과 폐허 위에서도 삶 자체의 의미를 정관하고자 하는 정신적 지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