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임순만] 벙어리장갑

입력 2011-12-28 18:33

지방 소도시의 초등학교 4학년 아이가 신문배달을 했다. 비 오는 날도 힘들지만 더 힘든 것은 한겨울에 신문을 배달하는 일이었다. 당시 겨울은 참으로 추웠다. 어느 집 문간방에 사는 젊은 부부가 소년이 배달하는 신문을 구독했다. 이른 새벽에 신문을 배달하니까 부부를 마주치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소년은 그들이 교사 부부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날은 성탄절 새벽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신문이요’라고 외치며 신문을 문 앞에 던지고 돌아서던 순간이었다. 그 때 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얘야’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부인이 작은 꾸러미를 내밀며 말했다. “추운데 신문 배달하는 것을 보고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려고 내가 뜨개질 한 장갑이다. 이 장갑을 끼고 신문 배달을 하렴.”

소년이 선물 포장을 열어보니 분홍색 털실로 짠 벙어리장갑이었다. 장갑을 끼고 신문 배달을 할 때마다 손뿐 아니라 마음까지 따뜻해졌다. 그들 부부의 마루에서 성경책을 본 적이 있다. 소년이 기독교인을 남다르게 보았던 첫 사례다.

소년은 훗날 신학생이 되고 신학대학원에 다닐 때에도 그 장갑을 간수했다. 오래 전 사용했던 장갑은 대학원생이 된 그에게 유용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털장갑을 볼 때마다 다른 사람을 따뜻하게 해주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장갑은 그가 미국에서 고학을 할 때에도 두고두고 떠오르곤 했다. 지난 성탄절 아침에 큰나무교회(서울 방화동) 박명룡 목사가 들려준 소년 시절의 일화다.

미국 라디오 연설가인 마릴린 혼츠라는 목사 사모가 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까지’(Listening for God)라는 책을 쓴 저자다. 가난했던 어느 해 그는 크리스마스에 쓰려고 35달러를 모았다. 사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러나 추운 겨울에 다 떨어진 운동화를 신고 있는 한 소녀를 보고 마음이 움직여 그 돈으로 소녀에게 부츠 한 켤레를 사주었다. 며칠 후 소녀를 만났을 때 소녀는 부츠 속의 내피만 신고 진흙탕 속에서 첨벙거리고 있었다. 부츠를 어떻게 했는지 물어보았더니 소녀는 “몰라요”라고 당당히 말하고는 달아나버렸다.

혼츠는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속상해서 기도를 하는 도중에 이런 음성을 들었다. “나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내 아들을 선물로 주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고마워하지도 않고 그를 진흙탕 속으로 끌고 갔단다.”

우리는 선물을 얼마나 감사해하고 귀하게 간직할 수 있는가.

임순만 수석논설위원 so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