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서민정] 할 것과 쉴 곳
입력 2011-12-27 18:45
우리 일상은 ‘할 것’과 ‘쉴 곳’으로 이루어져 있다. 둘 중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사는 게 힘들어진다. 할 것이 없으면 무기력해지고, 쉴 곳이 없으면 무능력해진다. 무엇이든 할 의지는 있는데 할 일이 없으면 기운이 빠지게 되고, 쉬지도 못한 채 할 일만 하면 결국에는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어제 하루 출근길과 퇴근길에 노숙인을 만났다. 출근길 커피 한 잔을 사고 있는데 창문 밖에서 노숙인 한 분이 간절한 눈으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내 커피를 바라보고 있었다. 차를 한 잔 더 사서 드렸다. 늦은 퇴근길에 노점상에서 귤을 사고 있는데 노숙인이 다가와 하나만 달라며 곱은 손을 내밀었다. 귤 한 봉지를 더 사서 드렸다. 커피와 귤을 받아들고 가시는 그분들의 뒷모습을 보며 할 것과 쉴 곳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사실 노숙인들은 할 것과 쉴 곳을 모두 잃은 후 극단적 상황에 처해 있는 이들이다. 나와 관계가 없는 것으로 여길 수도 있지만 주위에 할 것과 쉴 곳, 적어도 둘 중 하나는 없는 이들이 많아 사회적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인생의 꽃이 피는 시기라는 20대만 봐도 할 일이 없어진 세대가 되어, 청춘을 향한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라 위로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아프니까 청춘이다’와 같은 책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고, 토크콘서트가 열풍이 된 현상은 역설적으로 할 일을 찾지 못하여 기운을 잃고 있는 20대가 적지 않음을 반증하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반대로 할 것만 많고 쉴 곳 없는 이들이 있다. 나의 눈에 들어온 이들은 10대이다. 10대는 ‘학생’의 할 일로서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숨 돌릴 틈 없이 공부를 한다. 그런 그들이 쉴 수 있는 곳은 집일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10대는 집에서도 쉴 수가 없다. 쉬어야 할 곳에서도 해야 할 일을 요구받기 때문이다.
얼마 전 부모로부터 받는 학업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중3 학생과 그 어머니의 상담 내용을 다룬 언론 기사를 보았다. 아이는 집에서도 쉴 수가 없어 우울증에 걸릴 지경이라는데 어머니는 “공부·숙제·학원 빼면 화낼 일 없어, 우린 문제가 없어요”라며 왜 상담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이 모두가 우리 주변, 내 가족, 내 친구 혹은 바로 본인이 겪는 일일 수 있다. 어느 10대가 가족과 친구에게 해를 끼쳤다면, 어느 20대가 맹목적으로 자격증 따기에 매달린다면, 그건 단지 그 당사자의 문제만은 아니다. 할 것과 쉴 곳이 없어진 그들의 절망적인 하소연으로 읽어야 한다.
나는 현재 할 것과 쉴 곳이 있다. 다행이고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 곳곳에는 점점 할 것과 쉴 곳이 없어지거나 둘 사이 균형이 무너진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2012년은 60년 만에 돌아온 흑룡의 해라고 하니, 그 상서로운 기운을 받아 내 주변의 이들과 내가 알지 못하는 모든 이들까지 할 일도 생기고 쉴 곳도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서민정(문화예술교육진흥원 대외협력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