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박현동] 국정원 존재이유를 생각한다
입력 2011-12-21 17:55
누가 뭐래도 국가정보원(국정원)은 대한민국 최고의 정보기관이다. 50년의 연륜을 가졌고, 인적·물적 자원이 비밀에 속할 정도로 그 역할이 중대하다. 장관급인 원장과 차관급 4명이 있다. 군사정권 시절에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무소불위 권력을 휘둘렀다. 국정원 전신이었던 중앙정보부(중정)는 이런 과오와 부정적 이미지를 해소하기 위해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로 이름을 바꿔 달았다. 1999년에는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한다는 차원에서 현재 이름으로 교체했다. 이미지 변신과 신뢰 회복을 위해 두 차례 개명을 한 것이다.
중정과 안기부 시절 부훈(部訓)은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였다. 부훈이 말하듯 조직원들의 자존심과 희생정신이 남달랐다. 국정원으로 개명한 뒤 원훈(院訓)은 ‘정보는 국력이다’로 바뀌었다. 이명박 정부 들어 원훈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으로 변했다. 그만큼 부침이 심했다는 의미다.
한때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는 과오도 저질렀다. 박정희 정권 시절 김재규 중정부장은 정치를 주물렀고, ‘10·26사태’의 주범으로 사형을 당했다. 능력은커녕 자질이 의심되는 수장도 있었다. 노무현 정부 말기에 국정원장을 지낸 김만복씨. 정보요원을 대동하고 아프가니스탄 한국인 피랍 현장을 갔던 그는 카메라 기자 앞에 얼굴을 드러냈다. 당시 국정원은 ‘김만복 원장 인질협상 지휘’라는 보도자료까지 냈다. 국정원장의 동선도 정보다. 그런데도 스스로 정보를 노출하고 자랑까지 했다. 코미디 중의 코미디다. 그래도 분단이라는 한반도의 특수상황에서 국가와 국민의 안위를 지키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해온 점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국정원 역할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북정보 업무다. 하지만 김정일 사망과 관련한 국정원 능력을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로 볼 때 북한 당국이 김정일 사망을 공식 발표하기 전까지 국정원의 귀와 눈은 먹통이었다. 이미 네 차례나 ‘특별방송’을 예고하면서 시그널을 줬는데도 정보망은 마비상태였다. 낌새는 물론이고 감(感)도 못 잡았다. 직무유기가 아니라면 무능하다는 지적을 받아도 할 말이 없다. 사정이 이럴진대 정보를 사전에 왜 수집하지 못했느냐를 따지는 것은 사치일지도 모른다.
김정일 사망 4시간여 뒤 최고통수권자인 이명박 대통령은 일본 교토행 전용기에 앉아 있었다. 옆에는 대통령의 외교안보 정책을 보좌하는 천영우 수석이 있었다. 김관진 국방장관은 국방개혁법안 처리를 당부하기 위해 국회를 방문했다. 원세훈 국정원장이 어디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 대통령과 김 국방장관의 움직임을 볼 때 그 역시 김정일 사망을 전혀 모르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국회에 출석한 김 장관과 원 원장은 “TV를 보고 (김정일 사망을) 알았다”고 답한 것으로 전해졌다. 더욱이 김정일 사망 이틀이 지난 19일 오전 청와대에선 이 대통령 생일파티가 열렸다. 낯 뜨거운 일이다.
물론 국정원으로서도 할 말이 있을 게다. 안다고 다 말할 수 없다는 입장이라는 것도 이해한다. 그래도 이건 좀 심했다. ‘미국도 사전에 제대로 알지 못하지 않았느냐’ ‘김정일 정권의 폐쇄성을 감안해야 한다’는 항변도 있을 수 있겠다. 대북 전문가들이 지적하듯 ‘휴민트’(인적 정보망)가 붕괴된 상황에서 김정일 정권 내부 정보를 사전에 수집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도 틀린 주장은 아니다. 그렇더라도 김정일 사망을 둘러싼 국정원의 대응력은 수치스러울 정도다.
국정원이 홈페이지에 밝힌 미션은 이렇다. ‘최고 역량을 갖춘 요원과 고도의 정보활동을 바탕으로 국가의 안전과 이익을 저해하는 모든 위험요소에 선제적으로 대처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영속적 존립과 번영을 보장한다’고 했다. 나아가 이를 국정원의 존재이유라고 스스로 강조했다. 국정원은 국가의 자존심이다. 원세훈 국정원장의 책임이 필요한 이유다.
박현동 편집국 부국장 hd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