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오파트라 그녀에게 여왕의 자리를 돌려주라!

입력 2011-12-16 17:36


더 퀸 클레오파트라/스테이시 시프/21세기북스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 7세(기원전 69∼기원전 30년)는 ‘성적인 죄인’(단테)이거나 ‘동방의 왕들을 유혹한 여자’(보카치오), 매춘부 여왕이 아니면 팜므 파탈이었다. 2세기 로마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는 그녀를 ‘만족을 모르는 성적 취향과 탐욕을 가진 여자’, 나이팅게일은 ‘혐오스러운 클레오파트라’라고 혹평했다.

악평을 만든 건 드라마였다. 그녀 주위에는 영웅이 넘쳐났다. 정부(情夫)는 고대 지중해 패권을 좌지우지했던 두 남자.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였다. 클레오파트라는 그들을 차례로 유혹해 아들을 낳았다. 근친결혼과 살인의 드라마도 있었다. 그녀는 남동생 둘과 결혼했고, 권력 다툼의 와중에 형제들을 살해했으며, 그렇게 다진 권력으로 18년간 이집트를 통치했다. 관능적 여인의 영웅 정복기는 끈질기고 유혹적이어서 2000년 넘게 후대인에게 클레오파트라는 역사 아닌 멜로드라마, 불륜과 음모 배신 탐욕이 소용돌이치는 치정극의 주인공으로 치부돼왔다.

퓰리처상 수상 전기작가 스테이시 시프가 쓴 ‘더 퀸 클레오파트라’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영리하고 강력했던 여왕’이라는 정당한 타이틀을 되돌려주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야기는 세 번의 만남을 축으로 펼쳐진다. 기원전 48년 “아직 경험이 부족한 소녀”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 7년 후 “눈부시게 아름다운 전성기 여인”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 다시 11년 뒤 연인들은 모두 죽고 혼자 남은 중년의 클레오파트라와 적장 옥타비아누스의 만남. 책은 지중해 역사를 뒤흔든 세 번의 조우를 뼈대로 로마 공화정과 제정이 교체하고 동·서방의 정치가 충돌하는 기원전 지중해 세계의 국제 정치를 흥미롭게 그려낸다.

여인이 아닌 여왕 클레오파트라

클레오파트라는 여성이기 전에 여왕이었다. 9개 국어에 통달하고, 그리스 문학 역사에 박식했으며, 빛나는 눈과 잘 조절된 목소리, 영리한 비유로 상대를 설득할 줄 아는 수사법의 대가였다. 그녀가 조기교육을 받던 곳은 지구 둘레를 측정하고 태양을 관찰하던 헬레니즘 시대의 지적 수도 알렉산드리아. 클레오파트라는 파피루스 50만개가 소장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세계 최고의 지성을 스승으로 뒀다. 저자의 말처럼, 클레오파트라는 “아찔할 정도로 지적인 헬레니즘 전통의 계승자”였다.

그녀의 지적 능력만큼이나 주목할 점은 클레오파트라가 이집트어로 대화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이집트어 구사능력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직계 왕족 누구도 이집트어를 제대로 쓰지 못했다. 그들 모두 그리스식 교육을 받은 그리스계 엘리트였기 때문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알렉산더 대왕 사후 생겨난 범 그리스계 국가였다.

철저하게 그리스식 엘리트 교육을 받은 클레오파트라 역시 그리스어를 배우고,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와 투기디데스를 공부하고, ‘일리아드’ ‘오디세이아’를 암송하고, 소포클레스와 사포의 시를 읽었다. 클레오파트라가 남달랐던 건 그녀가 동시에 이집트어를 구사했다는 점. 클레오파트라는 “700만 백성의 언어를 힘들게 배우려고 노력한 최초의, 유일한 프톨레마이오스 왕가 사람”이었던 것이다. 덕분에 전임자들과 달리 클레오파트라는 소수의 그리스계 시민이 아니라 다수 이집트인들을 권력기반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더불어 잊지 말아야 할 한 가지. 이집트는 로마를 먹여 살린 곡식창고이자, 지중해 세계 최대의 부국이었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따져 로마의 장군들을 움직인 건 그녀의 미모였을 리가 없다. 남자들을 클레오파트라 주위로 이끈 건 여왕이 동원할 수 있었던 막대한 양의 황금과 식량, 군대였다.

승자가 만든 오해의 역사

누가 역사를 기록했는가. 오해는 ‘누가 펜을 쥐었는가’에서 출발했다. 클레오파트라를 역사에서 살려낸 건 로마인이었다. 카이사르의 ‘알렉산드리아 전쟁’, 디오 카시우스의 ‘로마사’,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등 이 책이 인용한 자료도 대부분 로마인의 기록이다. 이집트의 시각에서 클레오파트라의 행적과 업적을 평가한 자료는 거의 없다.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인이라는 ‘적’이 기록한 역사로 기억되는 셈. 저자의 표현처럼 “적대적인 언어로” 살아남은 것이다.

적이 쓴 역사가 호의적이었을 리가 없었다. 클레오파트라가 두 번째 연인 안토니우스와 연합해 옥타비아누스에 맞선 악티움 해전은 처절한 패배로 끝났다. 안토니우스는 자살했고, 9일 뒤 클레오파트라 역시 뒤를 따랐다. 승패가 갈린 뒤 역사는 즉각 개조됐다. 안토니우스는 “사랑에 빠져 정부에 조종당한 무기력한 남자”로, 클레오파트라는 무화과 바구니에 숨긴 독사에 가슴을 물려 자살한 악녀로 묘사됐다. 거대한 코브라가 무화과 바구니에 숨어 있을 수 있었을까. 상식적 질문도 매력적 스토리 앞에서 제 역할을 못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동방의 악에서 로마를 구해낸 해방자가 됐다.

클레오파트라 시대의 종말

클레오파트라의 몰락은 한 시대의 마감을 예고했다. 좁게는 300년간 이집트를 통치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끝. 넓게는 동·서방 문화의 자유로운 융합을 가져왔던 헬레니즘 문화의 침몰이었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죽었을 때 지중해 북쪽에서는 로마 공화제가 마지막을 고했다. 승리한 옥타비아누스는 초대 황제가 돼 40여 년간 로마를 통치했다. 후대인이 아우구스투스라고 기억하는 인물이다. 결국 클레오파트라는 “400년간의 로마 공화정과 헬레니즘 시대를 모두 가지고” 떠난 셈이다. 고대 세계는 그녀와 함께 저물어갔다. 정경옥 옮김.

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