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민태원] 공장같은 한국 의료시스템
입력 2011-12-14 17:36
“대한민국의 병원은 공장 돌아가듯 운영되고 있는 것 같다. 환자의 마음을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더 많은 사람을 더 짧은 시간 안에 처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장….”
세계 최대 인터넷 기업인 구글 미국 본사에서 모바일 광고 전략 책임자로 근무하는 재미 기업인 정욱진(29)씨가 얼마 전 국민일보에 보낸 이메일 내용 중 일부다. 지난달 초 그는 업무차 모국을 찾았다. 방한 기간 중 온몸에 가렵고 붉은 반점이 생겨 대학병원 2곳을 찾았다가 황당한 일을 겪었다고 한다. 보고 느낀 점을 언론사에 제보한 것이다.
그가 말하는 ‘공장 같은 병원’ 경험담은 이렇다. 정씨가 처음 찾은 곳은 서울 시내 C대학병원. 의사(내과 교수)는 그의 배에 난 반점을 4∼5초간 보고서 “수두 같다”고 진단하고 무조건 약을 처방했다. 왜 수두인지, 처방약은 어떤 것들인지 친절한 설명은 들을 수 없었다. 들어간 지 3분 만에 진료실을 나왔다.
혹시나 해서 찾은 S대학병원 피부과 교수는 배에 난 반점을 역시 3초 정도 본 뒤 “수두가 아니다”라고 했다. 구체적 병명은 조직 검사를 해 봐야 안다면서도 약 처방전은 바로 써 줬다. “무슨 병인지도 모르고 약을 주냐”는 질문에 의사는 “뭘 그렇게 궁금해하냐”는 귀찮은 표정으로 쳐다봤다고 한다. 시원한 답을 듣지 못하고 역시 3분이 안 돼 진료실을 나와야 했다. 그는 두 병원에서 아무것도 얻은 게 없었다. 오히려 불신만 커졌다.
처방전을 들고 약국에 갔더니 5종의 약과 바르는 크림을 줬다. 약사에게 물으니 소화제, 소염제, 항생제, 가려움 방지약 2종이라고 했다. 피부 반점에 왜 소화제가 필요할까. 처방전을 쓴 의사는 알겠지만 전화해서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원하는 답을 듣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고 한다.
미국에 돌아간 뒤 그곳 병원에서 정씨가 받은 병명은 전혀 다른 ‘장미색 비강진(염증성 피부질환 일종)’이었다. 의사(내과)는 그의 몸에 난 반점을 샅샅이 살핀 뒤 언제부터 그랬느냐, 많이 가렵지 않으냐 등 여러 질문을 했다. 약 30분간 문진과 진찰을 한 뒤 수두, 매독, 습진 등 가능성 있는 여러 질병과 증상을 세세히 설명해 줬다. 그리고 ‘장미색 비강진’이 가장 유력하다며 관련 사진을 친절히 보여주기까지 했다. 치료법과 처방 약에 대해서도 상세히 알려줬다.
정씨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한국 병원의 오진(誤診) 문제가 아니다. 우리 의료시스템의 후진성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다. 한국의 의료 기술이나 의사들 실력은 이미 세계 최고급으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환자 개인을 존중하는 마음’이 시스템 속에 녹아있지 않다.
미국 의사들은 자기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내세우지 않는다. 최대한 환자한테 병에 대해 가르쳐 주고 환자와 상의하며 치료해 나간다. 세계적 병원인 메이요 클리닉 환자의 80%는 입소문으로 오는데, 진료 과정에서 환자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공감하며 반드시 “더 하실 말씀 없습니까”로 마무리 짓는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권위주의적 진료’ ‘3시간 대기, 3분 진료’ ‘무조건적 약처방’이 고질병처럼 돼 있다. 환자는 치료 공식에 대입돼 아무 소리 못하고 처리된다. 공장에서 찍혀 나오는 상품이나 다를 바 없다. 우리 동포의 눈에 ‘공장 같은 병원’으로 비쳐질 수밖에 없으니 외국인이라면 어땠을까 싶다.
짧은 시간 안에 몇 명의 환자를 처리했느냐는 절대 일류 병원의 벤치마크가 아니다. 진료실에서 나온 환자들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얼마나 얼굴에 미소를 띨 수 있느냐가 진정한 선진 의료시스템으로 진화하는 잣대가 돼야 한다.
민태원 사회부 차장 tw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