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인문학] 혁명적 신학자 토마스 뮌처 (上)

입력 2011-12-12 17:55


농민 편에 선 개혁가 “영주 비위 맞추는 루터, 또다른 교황일 뿐…” 맹비난

“당신이 제후들을 책망했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오. 당신은 다시 그들의 비위를 맞추고 있소. 당신은 새로운 교황으로 그들에게 수도원들과 교회들을 선물로 주고 있소. 그래서 그들은 당신에게 만족하는 것이오.”

루터를 새로운 교황으로 비난하는 이 글은 시의회가 칼슈타트(1480∼1541)의 글을 압수하기 위해 인쇄소를 뒤질 때 함께 발견된 것이다. 칼슈타트는 비텐베르크대학 교수로 루터에게 신학박사 학위를 수여한 선배교수였다. 그는 루터가 바트부르크 성에 피신해 있을 때 비텐베르크에서 종교개혁 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계급적인 교회제도를 배척하고 사회적 평등주의를 실현하고자 했다. 또한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별하는 복장 착용을 반대해 농부들의 옷을 입고, 교회에서는 서로 형제라고 부르게 했다. 하지만 그는 루터와 달리 급진적인 종교개혁을 추진했다.

성서에 맞지 않는다고 제단, 성상, 성화를 부수어 버렸고, 교회 수입을 평신도 위원회에 맡겨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금과 가난한 처녀들을 위한 결혼 지참금으로 분배하게 했다. 아울러 성직자의 결혼을 찬동했고, 매매춘과 구걸 행위를 금지시켰다.

시의회는 칼슈타트와 그의 동조자들이 주장하는 종교적 공동체와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성상파괴운동과 더불어 기존의 사회질서까지 흔드는 급진적인 종교개혁에 불안해했다. 그는 시의회에 전 독일인이 교회개혁에 참여할 때까지 종전의 상태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다. 그 사이에 바트부르크에 은신해 있던 루터가 비텐베르크로 몰래 돌아왔다. 1522년 8월 23일 비텐베르크에 도착한 그는 8일간 행한 설교에서 개혁자들이 성경 지식은 남다르지만 급진적 개혁은 사회 혼란을 초래하고, 적그리스도가 좋아할 빌미를 제공한다고 비판했다. 루터는 개혁은 혼란이 아니라 자유와 질서 위에서 행해져야 하며, 이를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정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설교했다.

루터는 권력자의 입장을 대변했다. 그러나 칼슈타트와 같은 급진주의자들은 루터가 지나치게 권력과 타협한다며 루터와 갈라섰다. 선제후 프리드리히와 루터의 영향 아래 있던 시의회는 칼슈타트의 글을 금지했고, 그의 글을 압수하기 위해 인쇄소를 뒤졌다. 이 과정에서 또 다른 책자 ‘변론’이 발견된 것이었다. 이 책자에서는 루터를 종교개혁가가 아니라 새롭게 등장한 ‘비텐베르크의 교황’으로 노골적으로 비판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책자는 칼슈타트가 쓴 것이 아니었다. 이 책자를 쓴 사람은 토마스 뮌처(1490∼1525)였다. 루터를 비판하는 글은 이렇게 계속된다.

“당신이 전에 보름스에서 주권을 그렇게 고백했던 것은 당신이 그 주둥이를 잘 어루만져 꿀을 발라 주었던 귀족들 덕분일 것이오. 왜냐하면 그 귀족들은 당신이 당신의 설교로 그들에게 보헤미아의 선물(교회 재산의 세속화)을 주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이기 때문이요. 당신이 영주들에게 주기로 약속한 수도원들이 바로 그것이요. 만일 당신이 보름스에게 주춤거렸다면 당신은 석방되기는커녕 귀족들에 의해 창에 찔려 죽었을 것이요.”

루터의 종교개혁은 영주들의 지지가 없었더라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런데 이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교황과 황제에 반대했던 영주들의 지지가 없었다면 사실 루터는 이단 심문을 받고 진작 화형에 처해졌을 것이다. 루터가 프리드리히 선제후의 보호와 지원을 받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렇기 때문에 루터는 운신의 폭이 좁았을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 현실적 역학 관계에 대한 고민도 있었을 것이다. 그 고민 끝에 농민전쟁에서 루터는 농민편이 아니라 영주들의 편에 섰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런 루터의 보수적인 입장은 급진파들의 불만을 더욱 가중시켰다.

토마스 뮌처도 그러한 급진파 중 한 사람이었다. 토마스 뮌처가 루터에 대적하는 이 글을 쓸 때는 아직 농민전쟁이 발발하기 전이다. 그러나 농민전쟁은 이미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루터가 종교개혁의 횃불을 들어 올릴 때 농민들은 영주들과 달리 새로운 세상을 기대했다. 그가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 평등하며 만인제사장주의를 주장하고 기독교인의 자유를 선언하자 농민들은 새 세상이 열렸다고 기뻐했다. 농민들은 루터의 주장을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의미로 해석했다. 루터가 농민의 요구를 무시하던 영주들과 고리대금을 즐기던 자본가들을 비판하자 농민들은 환호했다. 그런데 정작 루터는 ‘폭력’에 의한 급진적인 사회개혁을 반대했고, 성경 말씀에 의한 점진적인 변화를 원했다. 그러나 농민들의 상황은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결국 농민들의 반란이 1524년 6월 남부 독일에서부터 시작됐다. 뤼펜 백작 부인이 연회에 쓸 딸기와 달팽이 껍데기를 모아 올 것을 요구하자 과도한 세금과 노동에 지쳐 있던 농민들이 이를 거부하면서 반란이 시작됐다. 한스 뮐러라는 평범한 농민이 주동이 된 이 반란은 영주와 귀족들에 대항하는 농민전쟁으로 발전됐다. 농민 반란은 순식간에 독일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1524년 말 독일의 3분의 1이 농민의 수중에 들어갔다. 농민반란 초기에 농민들은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온건한 방식으로 사회개혁을 요구했다. 그들이 1525년 2월에 작성한 12개 조항에는 그러한 요구가 잘 나타나 있다.

①목사는 회중에 의해 선택돼야 한다. ②가축의 십일조제도를 폐지하고, 곡물의 십일조는 목사와 다른 공동체를 위해 사용돼야 한다. ③복음 정신과 기독교인의 자유사상에 배치되는 농노제도는 폐지돼야 한다. ④농노는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된 자유인들이므로, 더 이상 소유물이 돼서는 안 된다. ⑤귀족들이 약탈해 간 수렵권, 어획권, 벌목권 등을 농민들에게 되돌리도록 법이 개정돼야 한다. ⑥과도한 세금제도는 폐지돼야 한다. ⑦농노에게 부과되었던 강제 노역은 폐지돼야 하고 정당하게 보수로 지불돼야 한다. ⑧과도한 소작료는 폐지돼야 한다. ⑨)귀족들에 의한 새로운 법 제정을 반대하며, 공정한 법의 집행과 성문화된 독일의 법으로 환원돼야 한다. ⑩영주들이 돈을 지불하지 않고 소유한 모든 공유지는 영주와 농민이 공동으로 소유해야 한다. ⑪과부와 고아를 불의하게 억압하는 상속세와 사망세는 폐지돼야 한다. ⑫위의 요구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에 저촉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철회돼야 한다.

농민들은 이 12개의 요구사항이 루터의 복음과 일치한다고 보고, 지배계급들과 화해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지배계급은 이러한 요구사항을 들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루터는 농민들에 대한 영주들의 탐욕을 비판했지만 결국에는 영주들 편에 서고 말았다.

토마스 뮌처는 농민혁명 이전부터 루터에게 지배계급인 영주가 아니라 가난하고 핍박받는 자의 편에 서라고 요구했다. 그것이 진정한 복음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길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그는 루터를 새로운 ‘비텐베르크의 교황’으로 비판하며 농민들과 함께했다. 그는 종교개혁의 횃불로 교회뿐만 아니라 세상에도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