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 다산과 제자 황상 ‘묵향 그윽한 교유’… ‘삶을 바꾼 만남’

입력 2011-12-09 18:04


삶을 바꾼 만남 / 정민 / 문학동네

유배객 다산 정약용(1762∼1836)과 소년 황상(1788∼1870). 26세 터울의 스승과 제자 사이다. 둘은 다산이 전남 강진 주막집에 연 서당 ‘사의재’에서 처음 만났다. 1802년 10월이었다.

“저는 재주가 둔하고, 앞뒤가 막히고, 답답합니다. 공부를 할 수 있을까요?”(황상)

“민첩하면 소홀하고, 날래면 들뜨고, 재빠르면 거칠다. 네게는 세 가지 병폐가 없으니 다잡아 공부하라.”(다산)

빈한한 시골 아전의 자식으로 공부를 꿈꾸지 못하던 소년은 ‘부지런하면 깨우칠 수 있다’며 스승이 적어준 ‘삼근계(三勤戒)’를 종이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지니고 살았다.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라.’ 그건 평생의 가르침이었다.

고전 대중서 분야에서 폭넓은 독자층을 이끌고 있는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가 다산과 황상이 시로 나눈 교유의 흔적을 44꼭지의 이야기로 정리했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담백한 문장으로 그 시절 선비들이 글 읽고 시 나누며 주고받은 마음을 차분하게 따라간다. 삶을 바꾼 만남은 다산과 황상의 인연만이 아니었다. 둘의 유배지 인연이라는 밑그림 위에 두 가문의 60여년 사연과 글 친구들 간의 우정을 채색하니 19세기 초 조선 문사들의 풍속화가 완성됐다.

다산은 숙제 많이 내주고 게으르면 매섭게 질책한 스승이었지만, 마음 가는 제자에게는 여간 다정하지 않았다. 황상이 앓으면 “네 병이 어찌 이리 극심하냐”며 근심했고, 병중에도 붓을 놓지 않는 제자가 기특해 쾌유 기원 시 ‘학질 끊는 노래, 황상에게 주다’를 짓기도 했다.

스승은 쉽게 토라지고, 금방 풀리는 아이 같았다. 혼인한 뒤 황상의 서당 발걸음이 뜸해지자 다산은 진노했다. “네 말씨와 외모, 행동을 보니 점점 태만해져서, 규방 가운데서 놀며 빠져 지내느라 문학 공부는 어느새 까마득해지고 말았다… 각방을 쓰라.” 당황한 제자는 만사 제치고 암자로 올라갔다. 그 뒤 제자가 보낸 시에 스승은 금세 “기쁨을 형언할 수 없다”며 화를 푼다.

아끼던 승려 제자가 소식이 없을 때는 “내 편지를 받고서도 여태 눌러앉아 있으니 절집의 술과 국수는 중하고, 이 늙은이의 편지는 가벼운 게로구나”며 발끈 성을 냈다. 편지 끝에는 이런 말도 붙였다. “9월 24일, 과거의 사람.” 이제 네 스승이 아니라는 절교선언인데, 변심한 애인에게 하는 경고마냥 다급하다.

다산과 인근 사찰 승려 혜장이 시로 맺은 우정에는 다산의 큰 아들 학연과 황상이 가세했다. 학연이 강진으로 아버지를 찾아온 1805년 겨울, 넷은 시 짓기 놀이를 하며 겨울밤을 소일한다. 항아리에서 운(韻)을 뽑아 각자 두 구절씩 5순배를 돌아 완성한 40구절 시. 학연과 다산의 문집에 동시에 전하는 시에는 나이와 종교를 초월한 글 친구 넷의 가난한 즐거움이 담겼다.

그때 만난 23세 청년 학연과 18세 황상의 우정은 다산이 세상을 뜨고 난 뒤에도 지극했다. 1855년 황상 생애 마지막 서울행은 다산의 둘째 아들이자 학연의 동생 학유가 죽었을 때 이뤄졌다. 황상은 학유의 부고에 “깜짝 놀라 정신이 다 날아가고/ 흐느끼니 눈물만 줄줄 흐른다”고 썼고, 학연은 “내 아우 운포(학유)가 죽었소”로 시작하는 장문의 편지로 답했다.

1859년 학연마저 세상을 떠나고 홀로 남은 황상은 집 뒤편 골짜기 ‘일속산방’에 은거한다. 1870년 83세 나이로 문우의 뒤를 따를 때까지 글 읽고 글쓰길 그치지 않았던 인생. 열다섯 살 때 처음 받은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라’던 스승의 가르침은 제자 삶의 끝까지 동행했다.

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