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인권 현주소] 피해자는 정신병 치료… 가해 16명은 ‘몰염치 대입준비’

입력 2011-12-08 17:45


대전에 사는 지적장애 및 신체장애 3급 정지은(15·가명)양은 지난해 5월 채팅에서 만난 남자 고교생들에게 약 한 달 동안 집단 성폭행을 당했다. 가해자만 16명에 달해 ‘대전판 도가니’로 불리는 이 사건은 오는 27일 최종 판결을 앞두고 있다. 사건이 세상에 드러난 지 1년이 넘었지만 가해 학생들이 수험생이라는 이유 등으로 선고는 계속 연기됐다. 이 과정에서 정양의 상처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깊어졌다. 국민일보는 대전에서 정양을 돕고 있는 지인 A씨(40·여)에게서 최근 사건의 전모를 들을 수 있었다. 수차례 정양의 아버지 정모씨에게도 접촉을 시도했지만 끝내 취재를 거절했다. 정씨는 ‘대전 지적장애여성 성폭력사건 엄정수사·처벌촉구 공동대책위’ 등 정양을 지원하겠다는 시민단체들의 손길도 거부하고 있다.

◇한 달간 성폭행, 아무도 몰랐다=정양은 초등학교 3학년이던 2005년 화재로 어머니를 잃었다. 이후 직업 없이 공사판을 전전하며 알코올 중독 증세까지 보이던 정씨 손에서 자랐다. 정씨가 “딸을 잘 돌봐 달라”고 부탁한 동네 복덕방 주인은 2008년 3월 정양을 성추행했다.

그 직후 정양은 “정상적인 가정의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는 아동보호전문기관의 판단으로 아버지와 떨어져 대전의 보호시설로 옮겨졌다. 이곳에서 정양은 초등학교 특수반을 졸업하고 2009년 3월 부산의 대안학교에 진학했다.

사건은 지난해 5월 정양이 대전으로 돌아와 다시 아버지와 생활하면서 시작됐다. 이때부터 정양은 인터넷 채팅을 시작했다. 채팅에서 만난 B군(당시 17세)은 정양이 지적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정양을 대전 둔산동의 한 건물 남자 화장실로 불러냈다. 이날 정양은 B군 등 고교생 3명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했다.

이들은 정양의 휴대전화 번호를 친구들에게 알려줬다. 대전 충남고·대전고·보문고·중앙고 등 4개 고교 학생인 가해자 16명은 이후 한 달 동안 정양을 수시로 불러내 건물 옥상과 화장실 등에서 번갈아가며 성폭행했다.

◇가해자들은 불구속기소, 부모들은 합의=10월 경찰은 “가해자들이 미성년자인데다 정양이 강하게 저항하지 않았고 폭력이 행사되지 않았다”며 가해자들을 불구속 입건했다. 경찰은 “정양이 상황 판단력 부족으로 가해자들을 따르고 먼저 접근한 정황을 ‘항거불능’으로 볼 수 없다”는 이유로 검찰에 불구속 기소의견으로 사건을 넘겼다.

이 사이 가해자들의 학부모들은 정씨와 합의를 시도했다. 정양이 두 달간 정신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는 동안 경제적 능력이 전혀 없었던 정씨는 가해자 1인당 300만∼500만원의 합의금을 받고 가해자들의 선처를 바란다는 탄원서까지 써줬다. 공대위 관계자는 “의사·사업가·공무원 등으로 사회적 기득권층인 가해자 부모들이 취약계층인 정씨에게 반강제적으로 합의를 요구했다”면서 “가해자들이 무죄 판결을 받는다면 이것은 명백한 사회적 범죄”라고 주장했다. 가해자 부모들은 “정양에게 지적장애가 없다”는 주장을 반복하며 정신지체장애인으로 등록돼 있는 정양을 정신감정까지 받게 했다.

지역사회와 시민단체의 반발이 빗발쳤다. 여론이 거세지자 검찰은 가해자들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그러나 지난해 11월, 대전지방법원은 가해자들에게 청구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재판이 길어지면서 정양의 기억은 점차 희미해져갔다. 가해자 중 공소사실을 인정한 2명을 제외한 나머지 14명은 수차례 진술을 번복하다 “정양과 합의하에 성관계를 맺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여론이 들끓는 가운데 지난 2월 대전지법 형사11부는 가해자들을 가정지원 소년부로 송치했다. 실형 대신 보호처분을 내린 것이다. 가정지원은 가해자들이 수능시험을 볼 수 있도록 예정된 선고를 12월로 연기하기도 했다.

◇선고 앞두고 시민단체 반발 거세져=현재 가해자들은 수능시험을 마치고 대학 입학을 준비하며 최종 선고를 기다리고 있다. 학교도 정상적으로 다니고 있다. 정양의 아버지는 합의금으로 집을 옮겼다. 시민단체만이 외롭게 가해자 처벌을 요구하고 있다. 전국장애인 부모연대 대전지부, 대전여성장애인 성폭력 상담소 등 시민단체들은 가해자들에 대한 법원의 선고연기 철회 및 형사법원 재송치를 요구하는 집회를 이어가고 있다.

대전장애인부모연대 한만승 사무국장은 “지난달 25일부터 법원의 올바른 판단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면서 “항거 능력이 없는 장애인 대상 범죄에 대한 양형기준이 현실성 있게 강화돼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경 기자 vick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