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상처는 시인의 상처다”… 고광헌 시집 ‘시간은 무겁다’
입력 2011-12-02 17:38
“실로 오랜만에 고광헌의 시를 읽는다. 시로부터 멀리 떠난 줄 알았는데 이렇게 시를 꼬불쳐두고 있었다니, 시인이 마치 시의 고향으로 돌아온 탕아 같다.”(시인 안도현)
안도현의 말이 아니더라도 시인 고광헌(58·사진)은 시단에서 오래 떠나있었다. 1983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와 무크지 ‘시인’으로 등단해 ‘5월시’ 동인으로 활동하던 고광헌은 고교 교사로 재직 중이던 85년에 낸 첫 시집 ‘신중산층 교실에서’를 뒤로 하고 민중교육지 사건으로 교단을 떠난 이래 언론계에 투신했다. 한겨레신문 사장을 지내는 등 24년의 언론인 생활 동안 그가 시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내인 김경미 시인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두 번째 시집 ‘시간은 무겁다’(창비)를 펼쳐드는 감회는 남다르다. “김경미 시인 문학상 받는 날, 예쁜 축하 화분이 왔는데요, 리본에 쓰인 글이 가슴을 때립니다// 祝 受傷 !// 상처를 상으로 받으니 축하한다는 건데요, 세상 어떤 시보다 더 시적이더라고요, 가슴속에 죽비가 떨어지데요, 시인은 세상의 모든 상처를 한 상 받아내는 운명이잖아요// 시인에게 상은 그저 아름다운 모욕이겠지요”(‘상처를 상으로 받아야 시인이지’)
‘상처’와 ‘상’이라는 이항대립적인 어휘의 시를 이번 시집의 첫 자리에 배치한 것도 심상치 않거니와, 세상의 상처는 곧 시인의 상처라는 지론까지 편다. 그는 시를 내려놓고 있던 세월에도 시를 붙들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어머니/ 머리에 보자기 두르고/ 학교 오시던 날// 누런 보리밭 옆 운동장으로/ 5월 하늘 새까맣게/ 무너지던 오후// 더 이상 나는/ 집으로 돌려보내지지 않았다// 쪽 풀린 어머니의 검은 머리칼/ 서울 와서/ 가방공장 여성노동자/ 데모에서 보았다/ 평생 일해도 갚을 수 없는 수업료// 그때/ 어머니 전 생애를 잘라/ 조용히 머리에 두른 것이다”(‘어머니가 쓴 시’)
자식의 수업료를 낼 돈이 없자 어머니는 쪽을 풀어 평생 기른 머리를 자른다. 그 머리에서 가방공장 여성노동자를 떠올리는 시인은 개인적인 감상에 빠질 수도 있는 시심을 민중의 삶으로 확장시킨다. ‘나’에게서 시작돼 ‘우리’에게로 헤엄쳐 오는 시어(詩魚)들의 활달한 지느러미를 보여주는 시집이다.
정철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