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서완석] 이솝 우화에서 배우는 상생
입력 2011-11-30 17:43
“손자병법에서조차 공생을 추구했지만 갈수록 각박해지는 우리네 삶이란”
초등학생 시절, 일본 교육학 잡지를 구독하셨던 아버지께서 하신 말로 기억된다. 이솝 우화 ‘토끼와 거북’의 내용이 한·일 교과서가 다르다는 것이었다. 우리 교과서는 달리기를 못하는 거북이 토끼가 잠자는 틈을 타 경주에서 승리한다는 내용인데 비해 일본 교과서는 거북이 잠자는 토끼를 깨워 손잡고 함께 골인한다는 내용이라는 것이었다. 그 후 일본 교과서가 정말 그렇게 돼 있는지 확인해 보지 못했지만 한 편의 이솝 우화를 두고 양국의 교육철학이 이렇게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뇌리에 꽤 오랫동안 자리 잡았던 것 같다.
약자도 열심히 노력하면 강자를 제압할 수 있다는 게 전자가 주는 교훈인 반면 약자가 노력하지 않은 강자를 타일러 함께 간다는 것은 후자의 교훈이다. 전자에게서 상대의 방심을 이용해서라도 이기면 그뿐이라는 승리 지상주의를, 후자에서는 정정당당한 승부로 더불어 살자는 상생의 교훈이 있다. 전자에게는 신자유주의의 냉혹함이 숨어 있는 반면 후자에는 사회공동체의 훈훈함이 녹아 있다고나 할까.
동양 고전 가운데 상생의 정신은 뜻밖에도 가장 살벌할 법한 병법서인 손자병법 곳곳에 펼쳐져 있다. 과거 무인들의 필독서이기도 했던 손자병법에 살생의 기법이 아닌 상생의 지혜가 녹아 있다는 것은 일종의 아이러니다. 손자병법은 ‘적국을 온전하게 두고 이기는 것이 최상책의 용병이고, 적을 파괴하여 이기는 것은 차선의 용병(凡用兵之法 全國爲上 破國次之)’이라 했다. 또 ‘백전백승이 최상이 아니라 싸우지 않고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이 최상(百戰百勝 非善之善者也 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이라고도 했다. 상대와 직접 교전을 벌여 상처를 주면서 얻은 승리는 지속 가능한 승리가 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함께 살아야 한다는 상생의 철학이다.
2500년 전 손자병법이 오늘날에도 꿋꿋이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팍팍해진 우리네 살림살이 때문이다. 담배 팔며 노후를 꾸려가던 동네 구멍가게들이 하나씩, 둘씩 거대자본의 횡포에 문을 닫는다. 동네 빵집조차 대기업의 가맹점이 아니면 살아남기 힘든 현실. 그뿐 아니라 할머니의 손맛이 담긴 두부 같은 먹거리도 거대자본의 먹잇감으로 전락했다. 탐욕스러운 1%의 자본이 99%의 다수를 지배하는 세상. 지금 미국 뉴욕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反)월가 운동’도 결국 상생을 외면한 탐욕스러운 자본에 맞선 집단 반발에 다름 아니다.
이미 손자병법은 ‘가서는 안 될 길, 쳐서는 안 되는 군대, 공격해서는 안 되는 성, 다퉈서는 안 되는 땅(塗有所不由 軍有所不擊 城有所不攻 地有所不爭)’이 있다고 했다. 전쟁이라고 해서 무조건 파괴하고 죽이고 무차별 공격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했다. 사리를 잘 분간해 공격해야 할 곳과 안 할 곳을 가리면서 희생을 최소화해 후유증을 줄이라는 뜻이다. 정복만이 능사가 아니라 공존공생을 염두에 둔 지혜가 번득인다.
그렇다면 ‘토끼와 거북’ 우화에서 보듯 자유경쟁은 무조건 선일까. 달리기 기능에서 확연한 차이가 나는 토끼와 거북을 동일선상에서 출발토록 한 것은 과연 공정한 게임인가.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자유경쟁이란 미명 하에 국민들을 무한경쟁 속으로 몰아넣는다. 상대의 허를 찌르더라도 승리하면 그뿐이라고 가르친다. 금메달이 아니면 기억 못하는 승리 지상주의에 찌든 사회. 거대 자본은 돈만 되면 어디든 고개를 내미는 불공정한 사회다.
상생 이데올로기가 이 땅에 시급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복지’가 정치판의 화두로 떠오른 것도 이 같은 현실을 반영한 때문이다. 상생을 실천하기 위해 국민들은 법과 제도를 만지는 정치인과 공무원들에 대한 기대감을 여전히 버리지 못한다. 하지만 법과 제도보다 중요한 것은 각자 마음속에 밝힌 사랑이란, 혹은 상생이란 등불이 아닐까. 이제 12월, 곧 연말이 다가온다. 어려운 이웃을 생각해야 할 때다.
서완석 국장기자 wssu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