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 내몰린 아이들 품다… 열린문청소년재단 황점곤 대표

입력 2011-11-30 09:38


그는 상처 입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행복의 문’을 열어주는 사람이다. 황점곤(47·열린문청소년재단 대표) 목사는 지난 20년 동안 한결같이 같은 일을 했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거리를 떠돌던 청소년들과 가정폭력과 방임으로 버려진 아동들이 아픔을 딛고 일어설 수 있게 도왔다. 그의 아동과 청소년 사랑은 오래전 체험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시작됐다.

생명의 싹

언제나 그의 주머니엔 약봉지가 서너 개씩 들어 있었다. 대학 2학년 때, 고시공부를 하던 중 원인을 알 수 없는 피부병으로 시름시름 앓았다. 건장했던 청년의 몸무게는 38㎏으로 줄었다. 동네사람들은 그가 한센병보다 심한 병에 걸렸다며 피했다. 의지할 곳은 주님뿐이었다. 매일 성경을 읽었다. ‘주님, 다시 나아서 전처럼 걸어 다닐 수만 있다면 천대받는 사람들, 나처럼 외면당하는 사람을 위해 일하겠습니다.’ 몸부림치며 기도하던 그에게 생명의 동아줄이 던져졌다.

꼬박 2년을 앓은 뒤 간신히 기력을 회복했다. 그러나 몸이 약해 정작 봉사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교회청소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울 선목교회에서 자정부터 청소를 하고 새벽엔 예배를 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기도 중에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계 3:8)라는 말씀이 떠올랐다.

“나에게 주신 ‘작은 능력’이 무엇일까 고민 끝에 그것은 재물도 아닌 나의 작은 지식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돌아갈 집이 없어 추위에 떨며 거리를 배회하는 청소년들을 한두 명씩 집에 데리고 왔어요. 이들을 위한 배움터를 만들기로 결심했어요.”

열린문 배움터

1990년 3월 31일. 후배 7명과 서울 묵동 삼거리의 허름한 건물에서 ‘열린문 배움터’를 시작했다. 하나님께 조건 없이 받은 사랑을 조건 없이 나누기 위해 모든 교육은 무료로 했다. 이 원칙은 지금까지 지켜진다. 또 하나님을 교장으로, 자신은 교감으로 살고 있다. 당시 그는 주간엔 주부들에게 한글, 영어, 성경을 가르쳤고 야간엔 청소년들을 가르쳤다. 새벽엔 배움터 운영비 마련을 위해 아파트 야간경비를 섰다. 빵과 우유를 먹으면서 일터로 달려가고, 버스에 서서 잠을 잘 정도로 바쁜 시간을 보냈지만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1년6개월째 계속됐다.

그가 인생의 가장 치열하고 바쁜 시간을 보낼 때 인생의 두 번째 고비가 찾아왔다. 92년 폐결핵 말기 진단을 받았다. 또다시 절망감에 빠졌다. ‘그동안 주님의 사역을 위해 살았는데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나요?’ 열린문 배움터 교사와 학생들은 그를 위해 중보기도를 했다. 친구들은 “하나님이 자네를 거둔다면 하나님의 손해일거야”라며 위로했다. 죽음의 낭떠러지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고 있는 그에게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교회에서 기도하고 있는데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아픈 부위마다 성령님의 만지심이 있었다. 그날 이후 병에서 해방되어 건강을 찾았다. 이제부턴 ‘덤의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열린문 배움터 교사들이 운영비 마련에 동참했다. 초·중·고등학교 앞에서 학용품을 판매하고, 공사장에서 번 돈을 배움터 운영비로 내놓았다. 이런 모습을 본 학생들은 차츰 변했다. 부모에게서도 받아보지 못한 관심과 사랑을 받은 아이들은 성적이 쑥쑥 올라갔다. 열린문 배움터 아이들 중에 전교 1등이 나오자 학부모들은 자녀들을 이곳에 보내고 싶어 했다. 지난 20년 동안 1만 여명이 배움터를 거쳐 갔고 현재도 배움터의 학습열기는 뜨겁다.

나·너 그리고 우리

그는 그동안 가정이 해체되어 오갈 곳을 잃은 아이, 가정폭력을 당한 아이, 약물에 중독된 아이 등 수많은 아이들을 만났다. 이들을 위한 구체적인 대안으로 94년 남자 가출 청소년 부랑아를 위한 ‘열린문 쉼터’, 96년 가정폭력을 피해 도망 나온 10대 가출 소녀들을 위한 ‘예꿈의 집’을 개소했다. 또 2003년 경기도 양평에 아동심성치유센터 ‘나·너·우리집’을 열었다. 현재 10여명이 머물고 있는 이곳은 피학대아동의 손상된 심성을 치유하는 곳이다.

그는 윤정(가명)이를 처음 만난 순간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 일곱 살 아이의 얼굴은 새까만 피멍이 들어 있고 손목과 발목은 골절돼 있었다. 아이는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밥을 주면 허겁지겁 손으로 먹다 토했고 선잠을 자다 이불에 소변을 봤다. 잠을 자다 없어져 찾아보면 옷장 속에 있었다. 어항 속 물고기를 가위로 잘라서 죽이는 폭력성도 보였다.

“부모의 심각한 폭행 속에 자란 윤정이는 치료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고등학생이 된 후에야 웃음을 찾았는데 지금은 별명이 ‘여자 노홍철’이에요. 올해 서울의 한 대학 아동미술치료학과에 입학한 아이는 자신처럼 어린시절 폭행당해 마음이 병든 사람을 돕고 싶다고 합니다.”

또 아버지에게 너무 심하게 맞아 한동안 말을 못했던 경수(가명·9)는 이곳에서 동물치료, 또래치료로 회복됐다. 아무하고도 말하지 않던 아이는 강아지에게 말을 걸고, 또래친구들과 물고기를 잡고 들판을 뛰놀며 차츰 마음을 열었다. 황 목사가 차에서 짐을 내리던 어느 날 아이는 또래아이들처럼 “목쌤 오셨어요” 하며 말문을 텄다.

풀잎들의 상처를 보듬으며

교육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삶이었다. 그는 신학기마다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 교장선생님, 담임선생님, 상담선생님을 집으로 초대하는 ‘오픈하우스’ 행사를 갖는다. 이때 선생님들에게 아이들이 이곳까지 오게 된 사연을 알려주어 학교생활에 협조를 얻는다.

그는 2001년 이옥주 사모와 결혼 할 때, 아이를 갖지 않고 이곳 아이들을 자녀로 삼아 살자고 약속했다. 주말엔 음식을 만들어 아이들과 양로원에 찾아가 봉사하고 가끔씩 승합차 2대에 아이들을 태우고 가족여행을 떠난다. 그저 아이들의 고민을 공감해주고 따뜻하게 감싸 안아주기만 했는데 아이들은 순순하게 변했다. “연극치료를 통해 아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면 부모에게 폭행당하며 고통스러웠던 마음, 버림 받았을 때의 서러운 원망과 분노가 터져 나와요. 함께 울고 기도해주어요. 응어리가 풀린 아이들이 해맑은 얼굴로 변할 때 너무 감사하지요.”

그는 2004년엔 충북 충주시 충주호 인근에 청소년심성치유센터 ‘라파의 집’을 개소했다. 라파(rapha)는 ‘치료한다’는 히브리어다. 가정폭력에 시달리거나 가정이 해체돼 오갈 데 없는 남자 청소년 15명이 생활하고 있다. 매주일 이곳에서 열리는 열린문공동체교회 예배에 서울, 양평, 충주 지역의 직원과 가족들이 함께한다.

꽃들에게 희망을

“부모에게 폭행당하며 성장한 아이들은 거리에서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을 다 죽이고 싶다고 말해요. 또 자신을 폭행했던 부모를 죽이고 싶다고 말해요. 얼마나 끔찍하고 가슴 아픈 일인가요. 이런 아이들이 성인되면 불특정 다수에게 분노를 표출할 수 있어요. ‘제2의 유영철 사건’이 우리 사회에서 나오지 않게 하려면 학대받은 아동의 예방과 치유가 절실해요 ”

그는 지난 10월, 경기도 양평에 피학대아동을 위한 놀이치료센터를 완공했다. 내년부터 장신대 희망나무장신상담센터, 청소년과놀이문화연구소, 한국기독교교육교역연구원과 협력해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유영권 연세대 교수, 이상억 장신대 교수가 슈퍼바이저로 참여하고 법무법인 광장이 법률무료지원을 한다. 치료비는 받지 않는다.

“아동이 폭력을 당하면 그 아이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치유방법이 적용돼야 합니다. 그리고 건강한 자아정체감이 형성되기까지는 일반적으로 폭력 당한 기간의 배 이상을 전문가로부터 치유 받아야 합니다. 놀이치료센터를 통해 아이들에게 웃음을 찾아주고 싶어요.” 그의 ‘풀잎사랑’은 변함없이 계속될 것이다.

양평=글 이지현 기자·사진 김민회 기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