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서민정] 음치의 계절

입력 2011-11-27 17:46


12월이 시작되는 주이다. 아니, 벌써 12월! 한숨부터 나온다. 이 한숨 속에는 올 한해 무엇을 하고 보냈는지에 대한 급작스런 반성만이 아니라 12월의 각종 송년모임이 안겨줄 스트레스에 대한 푸념도 섞여 있다. 송년 모임이 주는 스트레스 중 으뜸은 노래방이다. 노래를 잘 못하기 때문이다. 음주가무(飮酒歌舞) 중에 음주와 춤은 되는데 하필 모든 모임에서 빠지지 않는 노래가 안 되니, ‘아, 노래방이여!’라는 한탄이 절로 나온다.

노래방이 없었으면 이런 스트레스가 없었을까? 며칠 전 경주에 갈 일이 있었는데, 잠깐 들른 유적지에서 ‘주령구’를 알게 되었다. 주령구는 1975년 출토된 정사각형 면 6개와 육각형 면 8개로 이루어진 14면체 주사위이다. 각 면에는 신라인의 음주문화를 엿볼 수 있는 다양한 벌칙이 적혀 있었다. 그중 눈길을 끈 건 노래 벌칙이었다. 금성작무(禁聲作舞)는 노래 없이 춤추기, 일명 무반주 댄스라고 할 수 있겠다. 자창자음(自唱自飮)은 스스로 노래 부르고 마시기, 임의청가(任意請歌)는 마음대로 노래 청하기. 이외에도 두어 가지의 노래 벌칙이 더 있다. 유구한 역사 속에서도 술과 노래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였던 듯하다.

가만 생각해보면 나 역시 노래를 못하긴 하나 흥얼흥얼 부르는 것을 꽤나 즐기는 편이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걸을 때면 자주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노래방 스트레스는 노래를 못해서가 아니라, 노래를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암묵적 규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일부러 벌칙으로 정해놓은 것이 아닌 바에야 노래는 자기가 부르고 싶을 때 부르면 되는 건데, 우리 노래방 문화는 그렇지 않다. 노래를 잘 불러야 한다는 강박에서 못 벗어나 스스로 스트레스를 받는 건 둘째 치고, 상사가 한곡 뽑아보라면 주저 없이 불러야 한다. 분위기 가라앉히면 안 되니까 트로트도 몇곡 알아 두어야 한다. 상사는 상사 나름대로 나이 든 티 안 내려고 최신 유행곡 한두 곡쯤은 같이 부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노래방 풍경을 보면, 노래로 승부하는 사람이 있고 저것이 노래인가 싶을 정도로 목청만 잔뜩 높여 분위기 띄우는 것으로 승부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역시 후자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은 결코 훌륭한 가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취중에 만인에게 발악적으로 증명해 보이는 행위. 외로움과 소외감의 또 다른 표현. 소음을 통해 자신의 존재 불필요성을 타인에게 확실하게 알리는 행위.” 작가 이외수는 ‘감성사전’에서 ‘고성방가’를 이렇게 정의했다.

나는 올 12월에도 “살다보면 그런 거지, 닥쳐!”를 고래고래 외치며 보낼 것이다. 그저 즐겁게 박수만 쳐도 뭐라 할 사람 없고 부르고 싶을 때 부르는 분위기가 되기 전까지는, 노래방에서 내 존재의 불필요성을 확실하게 알리는 행위를 계속하게 되지 않을까.

서민정 문화예술교육진흥원대외협력팀장